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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Jul 28. 2022

좁쌀의 신중한 밑줄긋기




책방 방문객이 보면 나는 아무 책에나 밑줄을 박박 그어대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진열된 거의 모든 책들이 그러하니. 그러나 은근 신중한 스타일이다. 아무 데나 대고 좋아 좋아를 남발하는 헤픈 사람,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은 엄청 신중한데 믿으려나 모르겠다. 말해놓고 다시 기억을 돌려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리기도 하다. 책방 열기 전과 후로  태도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좋은 구절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그 자리에서 밑줄을 긋곤 했다. 뭐랄까. 초원의 양치기가 된 심정? 그 구절에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고삐 풀린 양처럼 어딘가로 달아나 버릴 것 같아 불안했으니. 만약 주변에 연필이 없으면? 아무나 붙잡고 필기구를 빌리곤 했는데. 의외로 요즘은 연필 가진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 핸드폰에 적지 그러냐는 반응이 절대적.

 

아무튼 나는 여러 장소에서 얻은 온갖 종류의 연필이 있다. 젊었을 땐 핸드백마다 생리대가 있었는데,  이즘엔 몽당연필이 꼭 한두 자루씩 숨어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도 줄을 그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참 몰두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가만 여기가 어딘겨? 하는 심정. 좀 자제하다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경우가 빈번해,  다 읽고 반납 전에 지우곤 했다. 그렇게 열심히 줄을 그으대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묻는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시시때때로 입만 열면 명언을 줄줄 읊어대는 것 아니냐고?


그런 사람을 보면 진심 부럽다. 어찌 저리 잘 기억할까? 탄복을 하다가 요즘은 그것도 내려놓았다. 저 포도는 신 포도야 하는 심정. 최근에 정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읽었는데.(이것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인스타에 올리기도 하고 정말 좋은 방법이라는 댓글도 달렸는데. 누가 달았는지만 생각날 뿐. 늘  이런 식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못 외우고 주변부는 잘도 기억한다). 좋은 구절을 그대로 외우려고 애쓰지 말고 내 문장으로 바꿔서 기억하라고. (인스타를 뒤져서 겨우 알아냈다. 변영주 감독이 한 말이다. 이 귀절도 내 식으로 저장 중이라니. 사실은 합체해서 자신의 말로 변신시키라고 했다.)


밑줄 긋기의 장점을 꼽으라면?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어디다 그을까 궁리하면서 읽게 되니 그 순간에 무지 집중하게 된다는 것. 언제나 그렇듯 선택지가 많으면 망설임도 크지만, 그을까 말까로 좁혀 놓으면 비교적 단순해진다. 일단 긋게 되면 왜 그을까? 골똘하게 된다. 그리고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재빨리 연필을 잡고 끄적이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즐길 차례. 밑줄이나 감상을 적고 보면 페이지를 그냥 넘기지 못한다. 괜히 그 부분을 스윽 바라보게 된다 할까. 뭔가 제대로 읽은 것 같고 흐뭇해져서는. 그리고 내 글이 좀 많다 싶으면 포스트잇을 붙이면 된다. 책방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너덜너덜한 내 책은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것을 멈출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렇게 한 책과 그냥 읽은 책은 확실히 다르다. 뭐랄까. 영상으로 본 음식과 직접 먹어본 것의 차이 같을까. 먹방을 보면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발품을 팔아 직접 먹어보면 혀에 각인되어 세세한 묘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처럼. 누군가는 몸이 기억한다고 했는데, 정말 틀린 말이 아니다. 삐죽빼죽 포스트잇이 달린 책을 보면 괜히 흐뭇하고,  이런 책을 많이 가진 내가 좀 있어 보이고 뭐 그렇다. 자뻑의 일종으로 나는 이렇게 치장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책방을 차리고 나서는 이게 좀 달라졌다. 잔머리를 쓰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전에 질문 하나. 책방 주인이 되기 전과 후, 내 독서량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바쁜 것으로 치면 책방 주인이 월등하게 일이 많다. 거기다 독서모임도 만만치 않아서 집안일은 거의 손을 놓았다. 그런데 책방에서는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뭐 달리 할 게 없다. 독서모임, 책 판매, 그리고 오로지 독서뿐이다. 가게가 작아서 청소도 간단하고,  창문으로 안이 환히 드러나서 낮잠을 잘 수도 없고,  허구한 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기도 민망하다. 그러니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책을 보는 수밖에.


그런데 상대적으로 밑줄은 덜 긋는다. 이게 너무나 쪼잔한 잔머리 계산을 하고부터인데. 책 판매는 정말 이문이 박하다. 하루 종일 동분서주해도 최저임금 벌기도 힘들다. 뭐 처음부터 돈 벌 욕심은 없다 입바른 소리를 했지만,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원가계산은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 결과 내가 밑줄 그은 책 한 권 값을 벌려면 최소 3권은 팔아야 한다는 답이 나왔다. 그걸 알고부터는 자꾸 망설이는 나를 발견했으니. 같은 책을 몇 권이나 팔 수 있을까 염려가 되면서 연필을 들고 그을까 말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책을 안 읽을 수는 없으니 곱게, 되도록 책등에 주름이 생기지 않게, 가능한 좁은 예각으로 책을 펴서 눈만 깊숙이 넣는다. 틈새 신공. 마치 화장실에 앉아 바깥의 TV를 볼 때나 하는 아슬아슬한 각도로 책을 읽는다. 아주 좋아서 이만하면 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이리 치사한 자세로 책을 본다.


그 돈을 아껴서 뮐하려고? 책 구매에 유난히 짜게 구는 사람을 볼 때 속으로 구시렁거린 말이 고스란히 내게 와 꽂힌다. 뭐 사실 갈등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30페이지 정도 읽고 나면 대충 윤곽이 드러난다. 연필을 들고 줄을  짜악 그을 때 얼마나 신나던지.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도 여백에 빼곡히 적는다. 그리고는 앞쪽으로 되돌아가서  망설이며 건너뛴 부분에도 표시를 한다. 속이 후련하다. 뒤이어 드는 생각. 아이고 이런 좁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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