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이스피싱을 당해

저요

by 사과집

지금 읽고있는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라는 책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자살>이라는 책을 쓴 스에이 아키라 씨의 모친은 젊었을 때 애인과 다이너마이트로 동반 자살했다. 모친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그는 이 체험을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마음을 다잡고 시노하라 가쓰유키 씨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는 웃으면서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고 느낀다.


나는 이것을 읽고 문득 나의 보이스 피싱 사기가 생각났다. 나는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고 진짜로 돈을 보낸 적이 있다. 직접 내가 모바일 계좌를 통해 사기꾼이 불러주는 계좌에 돈을 보냈다.. 세상에! 너무 바보같아서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 왠만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나도 이 얘기만은 남들에게 하질 못했다. '너 야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였는지... 경찰서에 신고하러 가는 택시에서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이 쪽팔린 기억을 어쩔 수 없이 말할 수밖에 없었던 몇 명이 있었는데 (내가 사기당할 때 옆에 있다가 정신차리게 해준 사람, 나의 정신빠짐에 대한 공백을 메꿔준 사람 등) 그 사람들이 그냥 웃으면서 별거 아닌 것처럼 넘겨줬을 때 마음이 편해진 기억이 있다… 스에이씨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생각이 난 기억.


내겐 지우고 싶은 과거를 제 3자의 기억처럼 시트콤화 해버리는 습관이 있다. 참담한 상황에서 나도 몰래 어이없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기시 마사히코는 이걸 “아무리 해도 달아날 수 없는 운명의 한가운데에서 스리슬쩍 새어나오는 진중하지 못한 웃음은 인간의 자유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다.”라고 참 유려하게도 표현했다.




+) 아직 그렇게 마음이 편해진건 아니라 여기에도 얼마를 사기 당했는지는 쓰지 못한다. 물론 바로 신고해서 전액 돌려받았지만요.. 아픈기억..

+) 그때 왜 내가 보이스피싱에 걸렸는지 진지한 대화를 했었는데 그 중 하나로 내가 티비를 보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다. 남들은 이미 티비에서 관련된 보이스피싱 경고를 많이도 들었더라. 왜 나는 그걸 하나도 보지 못했던가. 좋든 싫든 어떤 정보를 계속해서 접하는건 이렇게 중요한건가. 나는 내가 인터넷과 티비 등 매체를 잘 활용하고 내게 필요한 정보를 잘 걸러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남들 다 아는 보이스 피싱 예방 조언도 못들을 정도로 편협한 세계에 갖혀 있었던 것인가..

+) 보이스피싱에 대한 썰은 연재도 할 수 있지만 아직 내가 가슴이 아파서 쓰지를 못한다. 그때 전화 심각하게 받던 나를 생각하면 전봇대에 머리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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