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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퇴사 후 서울의 오피스텔을 빼고 캐리어에 모든 짐을 실어 여행을 떠났다. 계획은 1년 정도 해외만 떠도는 것이였는데, 어쩌다 보니 4개월 만에 잠시 한국에 돌아가 한 달 정도 머물르게 되었다. 엄마와 한번 제대로 놀아보기 위해서...
그때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 실업급여를 받고 있었다. 엄마는 매일같이 집에만 있기 심심하니 너도 백수일 때 한국에 와서 같이 놀자고 카톡과 보이스톡으로 나를 살살 꼬셨다. 심지어 그 당시 여동생도 회사에서 잘리고 실업급여를 받고 있을 때였다. 집 안의 네 명 중 여자 셋이 모두 백수고 아빠 혼자 돈을 버는 진기한 시기였다. (보통은 정반대였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 잠시 귀국하면서 세 여자의 백수 모임의 완성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엄마와 동생이랑 가장 먼저 간 곳은 슬라임을 파는 곳이었다. 동남아를 여행하는 약 4개월간 나는 유튜브에서 슬라임 영상에 중독되어 슬라임을 직접 만지고 싶다는 욕망에 미쳐 있었다. 집 근처에는 슬라임 파는 곳이 없어서 가장 가까운 이마트로 달려갔고, 아이슬라임 토핑 세트를 구매했다. 기본 슬라임과 얹을 수 있는 각종 토핑이 함께 있는 DIY세트였다. 그때 내 옆에는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만이 부모님과 함께 장난감 코너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소녀를 의식하며 전리품이라도 되는 듯이 거대한 슬라임 토핑 세트를 어른스럽게 카트에 담았다. '얘야 나는 내 돈으로 슬라임을 살 수 있단다.'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전혀 어른스럽지 않아..)
그 날 이후로 집에 있는 웬만한 시간에는 슬라임을 가지고 놀았다.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고... 그렇게 만든 슬라임은 하나하나 엄마에게 가져다 바쳤는데 내가 만든 슬라임에 대한 견해를 듣기 위함이었다. 엄마도 처음엔 "뭐야 손에 묻잖아" 하다가도, "이건 색이 이쁘네", "이건 손에 안 묻어서 좋다", "오 이건 오도독 소리가 좋다"라고 각각의 슬라임에 피드백을 주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신이 나서 "이게 바로 오도독 슬라임이라는 건데 토핑이 커서 손으로 주무르면 소리가 또 잘나죠", "이거는 내가 두 가지 색을 섞어보았습니다"라고 각각의 슬라임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게 나와 엄마는 티비를 보거나 컴퓨터를 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슬라임을 가지고 놀았다. 멍 때리며 슬라임을 조물거리고 기포 소리를 듣다가 옆을 보면 엄마도 똑같이 멍 때리며 슬라임을 조물거리고 기포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느 날은 편하게 누워서 티비를 보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슬라임 뭐가 제일 좋음?"
"슬라임마다 각각 장점이 다르네. 매력이 다 달라.
이건 소리가 좋고 이건 알갱이 크기가 적당해서 가지고 놀기 좋네 "
나는 "슬라임이 다 뭐 똑같지"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지만 엄마의 대답은 입시 코디네이터를 고르는 한서진 같은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어느 날은 같이 영화 보러 외출을 나갔다가 아트박스에서 슬라임을 하나 샀다. 엄마는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돌아오는 길에 새로 산 슬라임을 두근거리며 뜯었다. 만원이나 주고 산 눈꽃 슬라임은 슬프게도 손에 끈적하게 묻어났다. 이럴 때는 '액티'가 필요했다. 액티란 슬라임이 끈적일 때 한 두 방울 넣어 슬라임을 뭉치게 해주는 약품이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네이버에 <액티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아 액티 만들려면 붕사나 베이킹 소다 필요하네."
그렇게 차를 타고 집에 오는데 엄마는 갑자기 슈퍼 앞에서 차를 멈췄다.
"왜여?"
"여기서 베이킹 소다 사"
만원이나 주고 다 녹은 슬라임을 산 나를 보고 혀를 차면서도 엄마는 내심 슬라임을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낮에는 함께 슬라임을 가지고 놀았다면, 저녁에는 빠짐없이 엄마와 술을 마셨다. (아마 엄마는 같이 술 마시기 위해 나보고 귀국하라고 했던 것 같음) 매일 소맥만 먹다가 지겨워진 나는 언제 한번 데낄라를 사 왔다. 엄마. 오늘은 이걸 제대로 마셔 보십시다. 데낄라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며 나는 라임과 토닉워터까지 장을 봐왔고, 그날 저녁엔 소금과 커피, 그리고 각종 햄과 치즈 종류를 준비해 대령했다.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번에 소주 2병은 거뜬히 마시는 인물이다. 소주를 못 먹는 나는 가끔 대체재로 와인을 사 왔지만, 엄마는 자기는 와인은 받지 않는다며 언제나 소주를 고수했다. 하지만 데낄라는 달랐다. 홀짝홀짝 데낄라를 마시던 엄마와 나는 그날 데낄라의 2/3병을 비웠고, 토닉워터 5병을 조졌다. 주량을 초과한 나는 다음 날 머리가 아프다며 징징댔지만 엄마는 "나랑 데낄라가 잘 맞나 봐. 숙취가 전혀 없네"라며 주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며칠은 엄마와 저녁마다 남은 데낄라와 토닉워터, 라임을 해치웠다. 나는 한 달 정도 집에 머무르다 포르투갈로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어제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데낄라 한 병 사서 또 다 비웠잖니.
토닉워터랑 라임도 또 샀어"
낮에는 슬라임을 하고, 저녁에는 데낄라를 마셨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넷플릭스를 봤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를 엄마에게 영업했다. "엄마 이건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예능인인 루폴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드랙퀸들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거야. 드랙퀸이 뭐냐면 간단히 말하면 여장남자인데, 이 프로그램은 그저 그런 여장남자를 뽑는 시시한 프로그램에 아니라 최고의 예술가를 뽑는 한 편의 시이자 완벽한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라구..."
엄마는 흥미롭게 시즌 10의 첫 화를 같이 감상하다가 그날 같이 내리 서너 편을 보다 잤다. 그리고 오늘, 포르투갈에서 넷플릭스를 보기 위해 어플에 접속한 나는 "현재 이 계정에 접속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시청하시려면 다음의 디바이스에서 시청을 중지하셔야 합니다"라는 경고창과 마주쳤다. 알고 보니 엄마가 한국에서 티비로 <루폴의 스킨 워 : 보디페인팅 챌린지>를 보고 있었다. 드래그 레이스도 아니고, 아직 나도 안 본 루폴의 다른 리얼리티를 보다니..
나는 엄마가 요즘 무슨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현재 시청 중인 콘텐츠>를 클릭했다. 엄마는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 올스타', '루폴의 스킨 워 : 보디페인팅 챌린지', 더 나아가 루폴이 아니라 알리사 에드워즈가 진행하는 '드래그 댄싱퀸'까지 시청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엄마의 취향을 내가 여태 몰랐던 것은 아닐까. 앞으로 나의 취향을 부모님과 함께하며 공유해야겠다. 엄마가 모르는 세상을 열심히 보여주고 함께 즐겨야지..."와 같이 교훈적인 효심으로 마무리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넷플릭스 '현재 시청 중인 콘텐츠란'을 통해 엄마가 요즘 어떤 걸 보는지 몰래 살펴보고 실실 쪼개는 게 전부다. 내가 좋아하는 걸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지금은 그 대상이 예상하지 못했던 엄마이기에 스파이처럼 더 즐길 뿐이다. 그렇지 우리 한민족 핏속에는 데낄라가 흐르는구먼! 엄마도 슬라임 병에 걸린 게 분명하구먼! 루폴은 역시 모두가 좋아하는구먼!
연인이나 친구 관계가 좀먹어가는 순간은 "내가 좋아하는 걸 왜 넌 좋아하지 않아? 아니, 왜 좋아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건데?"라고 생각할 때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엄마에게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엄마가 슬라임/데낄라/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도 난 쿨하게 넘겼을 것이다. 내가 놀란 건 엄마가 그걸 '의외로' 좋아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취향에 대한 '갭 차이'를 이미 인지하는 사이에서 공유하게 되는 취미란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저 나는 엄마의 즐거운 리얼리티 시청을 위해 넷플릭스 결제나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땐 데낄라나 몇 병 사가면 그만인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슬라임 카페를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