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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02. 2019

주말드라마가 세상을 바꿀 방법

밥상머리와 주말드라마

밥상머리에서 혼나다



한 달 전쯤 안동에 있는 외할아버지댁에 놀러갔다. 눈이 소복히 쌓인 어느 날, 저녁을 먹기 위해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요리를 할 동안 나는 상을 피고 반찬을 꺼내왔고, 꺼내는 김에 아까 이마트에서 사온 맥주 한 캔도 꺼냈다. 하루 종일 아궁이에 장작을 떼우는 할아버지집은 따스했지만 건조했고, 나는 시원한 캔맥 하나가 절실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할머니와 엄마, 내가 상을 차리면 할아버지는 마지막에 자리에 앉으셨다. 나의 외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수저 색이 다르고, 온 가족이 모여 북적일 땐 남자와 여자 상을 따로 내는 곳이다. 제일 마지막에 수저를 뜬 나는 냉장고에서 꺼낸 카스를 조용히 따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엄마는 조용히 나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밥드시는데 무슨 반주니.”


원체 나는 부모님과 자주 술을 먹는 타입이고, 안동에 올땐 삼촌이나 이모부들과도 자주 술을 마셨다. 할아버지가 밥드시는데 혼자 맥주 한 잔 하면 안된다는 것을 엄마가 말하기 전까진 몰랐다. 할아버지는 술을 원래 드시지 않는 분이다. 아니, 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삼촌이랑 둘이 잘도 마시는거 내가 많이 봐왔구만 왜 나한테 모라구랭… 이라고 속으로 삼킬 뿐이었다.


그 때 티비에서는 KBS2에서 <하나뿐인 내편>이 방영 중이었다. 중후한 목소리를 가진 배우 한명은 티비 화면 너머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밥상머리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새아기, 큰아기, 뭔 불만이야? 당신, 회사 일이 당신 소관이야?”


중년 남자가 밥상 머리 앞에서 뭐하는 짓이나며 며느리들 앞에서 아내를 나무라고 있었다. 회사 일이 당신 소관이냐며, 밥이나 먹지 바깥일에 신경 끄라며.


그 놈의 밥상머리. 할아버지 식사하실 때 맥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는 엄마와, 밥상머리 앞에서 떠들지 말라고 회초리를 드는 <하나뿐인 내편> 을 보고 나는 한국인의 밥상머리 집착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 종일 KBS 연속극과 TV조선의 <모란봉 클럽>을 보고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가부장제 격파를 꿈꾸는 나. 남녀 겸상 불가능한 안동 김씨 가문의 밥상머리와 나 사이에는 은하수 만큼의 거리가 있다. 이 거리는 좁혀질 수 있을까?


KBS2 TV <하나뿐인 내편>



도대체 어른들은 왜 주말드라마를 보는 것일까?



왜 시대에 뒤떨어진 연속극은 요즘 시대에도 계속되는 것일까. 나는 넷플릭스를 제외하곤 한국의 TV 프로그램을 보지 않은 지 오래다. 스트레스를 주는 많은 프로그램 중에서도, 연속극은 여성혐오과 가부장제, 천편일률적인 젠더 역할을 재생산하는 최정점에 있다. (그 다음이 코메디 프로그램과 케이팝 프로그램이랄까.)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주말드라마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방송국에 화가 났다. 하지만 할머니가 시청하던 <하나뿐인 내편>의 최근 시청률은 39.9%다. 세상의 나쁜 것만 몰아넣은 구 시대의 산물로 치부하기엔, 나의 할머니와 엄마는 모두 연속극의 열혈 팬이다. 주말드라마 보지 마세요, 연속극 그만 좀 만드세요 - 라는 이분법적인 질문보다 생산적인 질문은 없을까. 3세대 손녀가 던질 수 있는 더 나은 질문은 무엇일까.


다시 질문해본다. 주말드라마는 항상 나쁘기만 한가? <하나뿐인 내편>을 통해 생각해본다.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줄거리를 가져와봤다.  


28년 만에 나타난 친부(최수종)로 인해 인생이 꼬여버린 한 여자(유이)와 정체를 숨겨야만 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 단 하나뿐인 내편'을 만나며 삶의 희망을 되찾아가는 드라마


일견 간단해보이지만 하나뿐인 내편은 총 106부작 드라마다. 유이가 최수종이 친부임을 알게되는 것은 50화 즈음이고, 아빠가 과거 범죄자였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은 72화다. 남은 30여화에는 본격적으로 ‘세상 단 하나뿐인 내편’을 만나며 삶의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예상가능한 플롯과 지지부진한 속도로 전개될 것이다.


내가 줄거리를 찾아보고, 엄마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며 드라마를 봤을 때 흠칫 놀랐던 것은 사람 좋아보이는 최수종이 살인자로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등장인물 소개를 살펴보니,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최수종은 아내를 만나고 딸을 낳으며 잠시 행복한가 싶었지만, 아내의 급성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만다. 아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고 감옥에 간 것이다.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거야? 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하나뿐인 내편>의 기획의도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은 자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범죄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세상의 편견, 멸시라는 보이지 않은 감옥 속에서 고통 받는게 과연 마땅한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재미있고 버라이어티하다 … 사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어떠한 비극이 우리를 덮쳐와도 그보다 더 큰 용기와 사랑으로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어쩌면 연속극을 보는 이유는 살인을 저지른 최수종과 27년만에 아빠를 찾은 유이의 눈물 겨운 재회 스토리를 보기 위함이 아닐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했다. “비극적이고 끔찍한 사건이 뉴스에 도배가 되어도 한 쪽에서는 새 생명이 태어나고 돌잔치를 한다.” 삶이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듯 하면서도 매번 굴러가고, 그 반복 안에서도 우리는 한 줄기 희망과 웃음을 발견한다. 이미 세상에 대한 거친 1회분의 겪은 엄마와 할머니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의 희노애락을 연속극에서 재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히 내가 연속극을 지지한다



본인을 연속극(Soap-opera)의 전문가라 지칭하는 디지털 스토리 텔러 케이트 아담스는, 테드 영상에서 일일드라마가 주는 교훈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속극을 본 적이 있다면 이야기와 인물들이 현실보다 과장될 수 있음을 알 것이고 팬이라면 그 과장이 재미있다고 느낄 것이고 팬이 아니면 그들이 과장되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혹은 연속극을 보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허풍 때문에 교훈이 사소하거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연속극은 삶을 단지 크게 보여주는 거죠. 우리가 연속극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실생활 교훈들이 있는데 그 교훈들은 모든 일일 드라마 줄거리가 그렇듯이 크고 모험적입니다.”


"연속극은 삶을 단지 크게 보여주는 거죠."


그녀의 말처럼 연속극은 실제보다 과장된 대규모의 드라마다. 하지만 우리의 삶도 최수종과 유이,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비극과 기쁨 사이를 순환하며 구원을 찾아 헤맨다. 비록 살인자 아버지를 28년만에 만나는 정도의 강렬함은 아니지만, 연속극을 보며 우리의 삶도 그만큼 강렬함으로 가득차고 극적임을 깨달을 수 있다. 흔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색다른 선택을 해 볼 용기를 주고, 우리 역시 과거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분좋은 환상을 심어준다.


그래서 감히 나는 연속극을 지지한다. 다만 연속극의 개혁을 꿈꾼다. 어쩌면 연속극의 개혁이야말로 밥상머리에서부터 세대 갈등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안동에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요즘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 우리의 은하수가 좁아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주말드라마 속 입체적인 캐릭터를 꿈꾼다. 금순이(한혜진)와 도란이(유이)로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야무지고 젊은 똑순이 여성 이상의 캐릭터를 원한다. 저 세상 스펙을 가진 엄친딸 커리어 우먼을 너머, 집에서 내조하는 남성 주부의 당연함을 꿈꾼다. 아들을 게이로 오해하고 선자리를 잡은 어머니(나홍실)은 이제 그만보고, 성소수자의 자연스러운 침입을 꿈꾼다. 동년배로 나오는 여남은 무조건 사랑으로 엮인다는 공식을 깨고, 반려동물과 잘 살아가는 비혼가구나 의젓한 1인 가구의 출연을 꿈꾼다. 이미 너무 혁신적이라 나를 입다물게 하는 넷플릭스가 아닌, 안동에 계신 할머니집 전파로 흘러들어갈 주말드라마의 소소한 혁신을 꿈꾼다.




<하나뿐인 내 편>을 시청한 그 날의 밥상머리에서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나도 유이처럼 가정주부 안하고 밖에서 일해도 돼요?”

“그럼”


할머니는 일하는 여성을 드라마 속에서만 봤을 수도 있을 테니까, 어쩌면 도란이(유이)야말로 나의 커리어를 지원해 줄 구원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할머니에게 “그럼 나 결혼 안해도 돼?”까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이 타이밍에 던지기엔 너무 과감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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