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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포르투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이동하는 날

by 사과집




오늘(2/10)은 리스본에서 3주를 보내고 포르투로 이동하는 날이다. 벌써 3주다. 벌써? 항상 이렇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 훌쩍 지나간 시간에 놀란다. 나의 여행은 매일이 연휴고 매일이 구정이라, 더욱 시간 감각이 없다. 벌써? 뭘했다고. 설마 서른이 되었을 때, 쉰이 되었을 때, 죽기 전에도 나에게 똑같이 물어보진 않겠지? 벌써? 뭘했다고?


언제나 그랬듯이, 알람 시간보다 두어시간 늦게 일어나서 당일 아침 짐을 쌌다. 씻고 짐싸는 것 까지 한 시간이면 할 수 있다. 풀고 싸는 것에 요령이 생긴 탓이다. 빠르게 짐은 다 쌌지만, 영 나가기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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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뷰가 좋았던 리스본의 에어비앤비


나는 항상 이동하는 날에 극히 불편함을 느낀다. 보통 2주에서 3주, 길게는 한달 간 한 숙소에 머무르는 이유도 전적으로 이동하기 귀찮은 탓이다. 그래서 2-3일에 한번씩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는 세계 여행자, 대부분의 시간을 교통수단에서 보내는 배낭 여행자들에게 언제나 감탄한다. 단언컨대 내 인생에 그런 여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포르투로 가는 버스는 마치 남부터미널에서 고향에 가는 듯이 편안했다. 고작 어제 한번 에보라에 가느라 이 터미널에 왔던 덕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전철역을 벗어나 터미널을 갈 때도 막힘 없었다. 티켓을 끊고, 주전부리를 사고, 익숙하게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내 고질병인 악취미도 없이 편하게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나의 악취미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낯선 환경에서 극도로 최악을 상상하는 것이다. 계단을 걸을 땐 항상 굴러 떨어지는 것을, 높은 곳에 올라갈땐 낙상하는 것을, 심지어 버스를 탈땐 이미 캐리어를 짐칸에 넣었으면서도 굳이 도난당하는 것을 상상하는 너무 나간 악취미. 놀라울 정도로 내향적이고 작은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철저한 완벽주의자 성향인 내가 이렇게 길게 여행을 한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타지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꽤 신경쓰이는 일이다! 처음은 언제나 어렵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언제나 첫번째 기회를 준다. 최초가 반복되면 버스를 타는 것도, 타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사는 것도 익숙해진다. 어쩌면 여행이란 최초의 반복이 계속되는 삶에 대한 파일럿이 아닐까. 많은 최초의 경험을 하는 것. 그것은 내가 평생 해야할 일이다. 여행지에서는 조금 간단하게 삶에 대한 예행 연습을 할 수 있다.


여행을 한 지 7개월째인 나는 아직도 사소한 것에 강렬한 두려움을 느낀다. 이럴 때마다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던 뮌헨에서의 전혜린을 떠올린다. 혹은 평생을 돌아갈 곳 없이 이방인으로 살아야 할 존재들을 떠올린다.






thumb_DSC03985_1024.jpg 포르투 도착


포르투의 첫인상은 섣불리 내리기 힘든데, 왜냐하면 일요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일요일의 포르투갈은 대부분의 레스토랑이나 상점이 문을 닫는다. 길거리엔 사람도 없고 한적하다. 따라서 일요일의 분위기를 포르투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일이다. 날씨는 좋고 건물의 높이는 리스본보다 더 낮고 더 친근한 동네같다. 첫인상은 이 정도로만 기억하기로 한다.


에어비앤비 숙소에 짐을 정리하고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가서 문어 요리 뽈뽀와 샹그리아를 먹었다. 구글맵에서 한국인의 평이 아주 좋았던 곳인데, 그 탓인지 2층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한국인 여성만 8명이었다. 밥을 먹고는 슬슬 도오루 강으로 산책을 갔다. 동 루이스 다리가 걸쳐진 도오루 강. 리스본에서 봤던 테주 강이나 타구스 강보다 내 마음에 든다. 테주와 타구스 강은 대서양으로 흘러가는 강이라 바다처럼 넓고 깊었다. 도오루 강은 내 아량으로 포용 가능한 정도의 강이라서 좋다. 대서양을 담기엔 나는 아직 부족하다.


어쨌든 도오루 강변에서 보이는 포르투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포르투갈에서 느끼는 점 중 하나는 언덕이 많아 멀리서 봤을 때 마을의 완곡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서울은 완곡의 아름다움은 산들이 담당하고, 걷는 곳은 편안한 평지가 많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매거진B 에디터 손현의 인스타에서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순간이란 감히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마케팅 도구로서의 죽은 표현일 것이다”는 말을 보았는데 깊히 공감했다. 여행이 재밌어? 매일이 스펙터클하고 인생이 바뀔 정도는 아니지만 재미있어. 거긴 멋있어? 평생 잊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름답고 멋있어. 도우루 강도 그 정도로 멋있다. 이 정도로 포르투의 첫날은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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