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쿨렐레와 퇴사
“니 우쿨렐레 샀어. 외국갈 때 가져가”
친구 P의 카톡이었다. 그때 나는 3년 다닌 첫 직장의 마지막 출근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뮤지션인 P는 퇴사 후 긴 여행을 준비하는 나를 위해 우쿨렐레를 선물했다. 우쿨렐레의 뒷면엔 P가 직접 새긴 잭 케루악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Live, travel, adventure, bless, and don’t be sorry
당시, 그러니까 2018년 7월에 나는 그 문장에 완전히 사로잡혀 내가 읽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적어두고 다녔다. 직장인으로서의 지위를 일정 기간 내려두는 나에게 1950년대 미국의 방랑자들이었던 ‘비트닉’이란 얼마나 손을 뻗어 잡고싶은 로망이었는지. 나는 항상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와 같은 비트 제너레이션을 동경했는데, P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트닉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잭 케루악은 곧 긴 여행을 떠나는 나에게 완벽한 하나의 문장을 선사했다.
퇴사를 준비하며 나는 일종의 잠재적 퇴사자를 위한 수업을 제공하는 '퇴사학교'에 다녔는데, 실상 진정한 퇴사학교를 맛본 건 P의 집이었다. 1박 2일로 머물렀던 그날 나는 인생 처음으로 P의 집에서 탈색을 했고, 밤새 P와 P의 남자친구에게 박자 감각을 레슨받았고, 내 기억으론 6시가 넘어 잠들었다. 3년간의 회사독을 48시간만에 풀어주는, 돈주고도 못받는 저 세상 퇴사학교였다.
그 때 강행한 박자 레슨이란 서울 퀴어퍼레이드의 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P는 퀴어 퍼레이드에서 데뷔하는 본인의 무대에, 취미 생활로 피아노를 1년간 배운게 전부인 나에게 키보드를 쳐보라고 제안했다. 보통 우정으로 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P와 함께 오른 8월의 서울시청 그 무대에서, 나는 강렬한 해방감을 느꼈다. 인생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경험 중 하나였고, 그곳에서 우리는 평화와 젊음과 사랑을 노래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선선한 바람,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무기력에 빠져 건들지 못하고 방치했던 방을 곤도 마리에처럼 바꿔준 것도, 내가 퇴사 후 2년간 짐을 비울때 함께 해준 것도, 수십권의 책과 짐을 맡아준 것도 P였다. P는 언제나 내게 자극과 영감을 동시에 주는 친구였다. 아마 피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인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고 다니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길게 P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이 모든 우쿨렐레와의 동행은 P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고, 앞으로 우쿨렐레에 대한 나의 이야기에 종종 등장할 인물이기 때문이다.
퀴어퍼레이드에서 키보드를 치고나서 약 한달 후, 나는 P가 준 우쿨렐레를 캐리어에 넣어 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로 여행한지 약 200일째다. 여행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나는 내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우쿨렐레도 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볼 줄 알았다. 물론 대부분의 것들을 듬성듬성 하긴 한다. 그러나 기대 이상으로 나의 시간을 함께해주는 건 다름 아닌 우쿨렐레였다.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는 내향적 성향의 나는 집이나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아주 가끔 나가서 답사를 한다. 내향적 여행자의 고독한 방을 채워주는 건 매번 손으로 집기 쉬운 코드의 우쿨렐레 음율이었다.
우쿨렐레와 여행을 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적막한 공기를 채우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곧 우쿨렐레를 칠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것, 우쿨렐레 부자재를 구하기 위해 구글을 검색해서 타지의 악기점을 방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P와 우쿨렐레가 없었으면 내 여행은 고구마처럼 퍽 답답했을 것이다. 내 인생도.
매거진 <캐리어 속 우쿨렐레>는 퇴사 후 1년간 낯선 곳을 떠도는 내향적 여행자가 방 밖을 나가기는 커녕 우쿨렐레와 제일 친해지는 과정을 담은 삼삼한 여행 에세이입니다. 우쿨렐레 권태기를 지날 즈음, 글쓰기를 핑계로 어려운 주법도 연습하고 완곡 커버로 유투브 데뷔도 하겠다는 조금은 당찬 포부로 씁니다. 비정기적으로 연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