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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May 30. 2019

퇴사하고 우쿨렐레를 배우러 갔다

2. 우쿨렐레와 레슨

매거진 <캐리어 속 우쿨렐레>는 퇴사 후 1년간 낯선 곳을 떠도는 내향적 여행자가 방 밖을 나가기는커녕 우쿨렐레와 제일 친해지는 과정을 담은 삼삼한 여행 에세이입니다. 우쿨렐레 권태기를 지날 즈음, 글쓰기를 핑계로 어려운 주법도 연습하고 완곡 커버로 유튜브 데뷔도 하겠다는 조금은 당찬 포부로 씁니다. 비정기적으로 연재 예정! 우쿨렐레를 선물 받은 첫 번째 화를 보시려면 ☞이 곳으로 



퇴사하고 

우쿨렐레를 배우러 갔다


친구 P가 퇴사 선물로 준 우쿨렐레는 곧 시작될 여행에 대한 낭만과 설렘을 촉진시켰다. 분위기 있는 짙은 오크색의 윤기 나는 우쿨렐레를 볼 때마다 이 작은 반려 악기가 가져다줄 새로운 세상에 대한 망상에 빠지곤 했다. 히피들의 천국이라는 태국 빠이에서는 우쿨렐레 가방을 동전함 삼아 버스킹을 해야지, 유튜브에 우쿨렐레 연주 영상도 차곡차곡 올려 우-투버(우쿨렐레 유투버)로 이름을 떨쳐야지….


하지만 나는 기본적인 코드도 몰랐다. 헛된 로망에 빠지기 전에 우쿨렐레를 배우는 게 우선이었다. P는 우쿨렐레는 배우기 쉬워서 한 시간 안에 한 곡을 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6개의 현을 가진 기타와 비교하면 우쿨렐레는 4개의 현 뿐이고, 사이즈도 한 팔에 다 안길 정도라 손으로 코드를 잡고 연주하기 쉽다. 요즘에는 유튜브에 초보자를 위한 강의도 많이 올라와서 독학으로 배우기도 편하다. 반려 악기로는 우쿨렐레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나는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여행을 한 달 앞두고 집 정리와 책 출간 등 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기에 우쿨렐레만큼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기본기를 착실히 다지고 싶었다. 언젠가 여행 드로잉을 배우면서 촉매제 역할을 하는 존재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도 학원에 가는 데 한몫했다. 취미를 새로 시작할 때 내 열정을 말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순간을 가뿐하게 넘길 스승이 제 타이밍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달까. 무지의 상태로 여행을 떠났다가 금방 흥미를 잃고 우쿨렐레가 짐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운이 좋게도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우쿨렐레를 배울 수 있었다. 1년 넘게 나의 피아노 레슨을 담당한 선생님은 내가 퇴사를 했던 즈음 우쿨렐레 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나는 퇴사를 하고, 친구에게 우쿨렐레를 선물 받은 때에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우쿨렐레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 운명같이 느껴졌다. 내가 끼워 맞춘 운명이지만 선생님이 꼭 나의 빛나는 앞날을 위해 자격증을 딴 것처럼...


그렇게 나는 여행 출국일을 한 달 앞두고 피아노 레슨비를 고스란히 우쿨렐레 레슨비로 지불했다. 나의 우쿨렐레 과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나 신나요 �



고향의 봄과 

하바나 사이


나의 피아노 선생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고 교회에서 전문 반주를 맡고 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수많은 초등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분으로, 정석적인 클래식 커리큘럼을 고수하는 상냥한 유치원 선생님 같은 분이다. 선생님은 우쿨렐레 수업에 있어서도 갓 우쿨렐레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의 경건한 스탠스로 단 하나의 오차도 없는 열정적인 커리큘럼을 고수했다.


첫날 선생님은 우쿨렐레의 명칭과 운지법을 알려줬다. 우쿨렐레는 기타와 똑같이 머리(헤드)-목(넥)-몸(바디)로 구성된다. 왼손의 검지, 가운데, 약, 새끼손가락은 각각 1,2,3,4번 지판(프랫)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은 항상 올바른 프랫 위에 위치해야 하며, 손가락은 짧게 깎아 코드음을 확실히 세워 누르는 게 좋다. 우쿨렐레를 연주할 때는 목에 걸 수 있는 스트랩을 사용해야 안정감 있는 연주가 가능하며, 헤드의 각도는 45도를 유지해야 한다...



자세와 운지법을 배운 이후에는 기본적인 코드를 배우고 교재에 나열된 동요들을 하나씩 마스터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호키포키, 과수원 길, 네 잎 클로버…. 코드만 2박자/4박자와 같은 리듬에 맞춰 연주하다가, 곧 타브 악보를 보고 음을 하나하나를 아르페지오로 연주하거나 멜로디 연주를 했다. 그러나 연습곡이 동요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한 장의 패스도 없이 모든 페이지의 동요를 꼬박꼬박 가르쳐주는 선생님 덕에, 집중력이 낮은 나는 수업 중간 정신을 잠시 잃고 잠의 세계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우쿨렐레 수업은 자세와 기본기를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여행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의 수업, 나는 '고향의 봄'은 그만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여행 중간 어떤 특별한 상황에 닥쳤을 때 우연히 곡을 연주하게 되더라도 글로벌하게 먹힐 만한 그런 곡이었다. 분위기라도 잡은 무드 있는 상황에서 고향의 봄을 연주하며 남북정상회담 텐션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에게는 필요한 것은 K-애수가 아니라 애플뮤직 탑100의 감성이었다.


그때 유튜브에서 카밀라 카메요의 하바나(Havana) 우쿨렐레 튜토리얼을 봤다. 그래, 이거다. 에드 시런의 'Shape of you' 보다는 최신곡이면서 어느 나라의 누가 들어도 알 만한 곡이었다. 나는 피아노 학원에서는 고향의 봄을 연습하고, 집에서는 나름의 일탈로 하바나를 연습했다. 하바나는 익숙하고 신나면서도 끈적였고, 우쿨렐레 줄을 튕기거나 두드리는, 내가 얼핏 알고 있는 우쿨렐레 연주법들도 가미되어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허배나 오내나.. 우 우우우...


출국 전 나의 한 달은 홍난파와 카밀라 카베요가 기묘하게 혼종 되어 있었다. 우쿨렐레 교재에는 동요뿐이었고,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는 사대주의자의 그것이었다. 정석 레슨과 일탈 독학 사이의 긴장감은 나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즐거운 상승 작용을 느끼며 우쿨렐레와 조금씩 친해져갔다. 



이걸 보고 연습했다. 우쿨렐레 한 번도 안쳐본 사람도 바로 하바나를 칠 수 있게 된다. 유튜브 최고



취미를 새로 시작할 때 

필요한 것


'여행을 하며 직접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이면에는 사실 온갖 망상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원래 모든 취미는 그런 검은 욕망에서 시작하지 않나. 드로잉을 배울 때는 여행 드로잉 전시라도 할 것 같고, 운동을 배울 때는 좀 있으면 김사랑이 될 것 같다. 우쿨렐레를 시작하는 나의 뇌 속은 그런 검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 내가 여행하는 1년 동안 우쿨렐레 연주의 신의 경지에 오르면 어떡하지? 이러다가 나 "아무튼 우쿨렐레" 시리즈 내는 것 아니야? 북토크 하면 우쿨렐레 연주라도 해줘야 간지인데...


모든 여행이 다 끝나고 글을 쓰는 지금 내가 생각한 뇌내망상 중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우쿨렐레 코드를 간신히 치고, 16비트를 연주할 땐 박자를 놓칠까봐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그래도 우쿨렐레가 없는 여행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9개월의 여행의 모든 순간에 우쿨렐레가 함께했다. 환상으로 시작한 우쿨렐레는 이제 나의 일상에 평범하게 녹아들며 진짜 나의 '반려 악기'가 되었다. 근사한 스포트라이트는 없는, 오직 나와 반려악기만 존재하는 조용한 방 안에서. 

 

취미를 새로 시작할 때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어려운 순간에도 충격을 받지 않고 사뿐히 착륙할 수 있게 해 줄 스승님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운 좋게 친구도 있었고, 선생님도 있었고, 유튜브도 있었다. 두 번째로 취미에 깃든 각종 로망과 환상은 우쿨렐레를 식지 않고 계속 연주할 수 있도록 부채질해준다. 비록 이뤄지는 건 하나도 없더라도, 반려 악기가 가져다줄 새로운 세상을 마음껏 망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니까.







* 다음화에서는 우쿨렐레를 가지고 동남아로 본격적인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D


태국 빠이, 마나우 게스트하우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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