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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27. 2019

죽음에 대한 사적인 가이드라인

어떻게 죽고 싶어요?



오늘 본 텍스트가 우연찮게 모두 죽음에 대한 것들이라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먼저, 어디서 누구와 함께 죽을 것인가. 김승섭 교수는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죽음에 대한 주도권이 개인에서 의학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지적했다. 본래 임종이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치러내는 의식으로 '일상성'이 핵심이다. 하지만 지금 대부분의 사람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이란 ’의료적 처치의 중단으로 인한 기술적 현상’일뿐,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있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우아하게 죽을 수 있는 주도권은 사라졌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이를 ‘죽음의 죽음’이라고 불렀다. 훗날 나에게 호상이라는 행운이 온다면, 내가 원하는 안락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을 전하고 존엄하게 눈 감고 싶다. 필요하다면 안락사에 대한 동의도 미리 끝내둘 것이다. 


시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폐, 심장, 각막, 췌장, 간 뼈, 피부 등, 성한 곳이 있다면 나누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과거에는 헌혈도 미친 짓이었으니, 언젠가 장기 기증도 헌혈같이 당연해질 때가 올 것이다. 시신 기증은 의료계가 조금 덜 남성중심적이고 덜 가부장적이며 더 윤리적이라는 확신이 생길 때 신청하고 싶다. 다만 젊었을 적부터 바지런히 공유경제를 실천해야할 장기들도 있다. 두 달 전 엄마와 조혈모세포 이식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다. 막장 드라마가 망친 탓에 '조혈모세포 이식'하면 공포스러운 골수 이식만 떠올리지만, 요즘은 골수 추출 방식의 이식은 5% 정도이며 대부분 팔에서 채취하는 말초혈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헌혈 마스터인 엄마는 조혈모세포 이식은 만 18세 이상, 40세 미만만 가능하다는 정보를 보고 곧 실망했다. 성할 때만 줄 수 있는 자원도 있다. 어쨌든 내가 자원이 될 수 있다니, 오랜만에 쓸모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남은 자여, 나의 모든 것을 다 털어가시길.


장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진보적 장의사라고 불리우는 케이틀린 도티는 친환경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장례 문화에 대해 제안한다. 현재의 장례는 위생을 위해 시신에 포름알데히드를 주입해 방부처리하고(에볼라 정도의 전염병이 아닌 이상 그런 화학작용은 불필요하다), 시신에 염료를 주입해 살아있는 것처럼 치장하며, 콘크리트/금속/원목 등 수많은 자재를 활용해 매장한다. 화장은 친환경적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시신 한 구를 화장할 때마다 차로 800km 달릴 수 있는 천연 가스의 양을 소비한다. 케이틀린이 제시하는 미래의 장례방법은 시신이 자연스럽게 부패하고 세포분열하여 뼈로, 흙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흙이 되고, 묘지는 그 흙으로 만든 녹색 공간 그 자체가 된다. 그 곳엔 그 지역 고유의 수목과 동물들이 서식하고, 정신 수양의 장소가 되기도 하며, 애도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내 시신을 가족이 어떻게 찾냐고? GPS를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장례 방식은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이다. 하지만 비용적인 면을 차치하더라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발상 자체가 내게는 매우 이상적으로 들린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GPS를 통해 포켓몬고처럼 나를 찾는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때도 구글맵을 쓴다면 '가고 싶은 장소'로 나를 저장해줘. 


하지만 내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나의 시신으로 타인을 살리고,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살아온 삶이 아름답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지저분한 삶을 살고 깨끗하게 죽는 것이 가능할까. 본인은 만족할지언정 남겨진 이들에게 비웃음 당하기 딱 좋다. 죽고난 후 비웃음 당하는게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오늘 서울대 노교수가 졸업생들에게 보내는 축사를 읽었다. 모든 것이 막막해보여도, 쉽게 항복하지 마세요. 개인적 존재의 자존심을 지키세요. 스스로 부패하지 마세요. 어쩌면 우리가 자기만의 이유를 찾아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존재의 자존심은 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가게 도울 자양강장제가 아닌, 내가 기로에 놓일 때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 도와줄 삶의 방부제가 되어 줄 것이다. “방부제 없이 살다 망가져버린 여러분 선배들의 모습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잘 죽는다는 것은 죽기 직전 삶을 돌이켰을 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육체가 부패하더라도 영혼은 부패하지 않는 것이다.




* 오늘 본 것들


*조혈모세포 기증에 대해 궁금하다면



 PS. 방금 한 생각.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이 글이 정말 나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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