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연습
얼마 전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간 적이 있다. 돼지 불백집에 가기 위해 시장 초입을 지나려는데 열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은행 앞에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 한가운데엔 40대로 보이는 여성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렌즈를 끼지 않아 상황이 흐릿하게만 보였는데, 나보다 시력이 좋은 엄마는 내게 그 광경을 설명해주었다.
“간질인가 봐. 거품을 물고 있어."
엄마는 현장 근처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나는 그분이 머리에 많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성을 도우며 직접적으로 상황을 수습하는 사람은 두어 명 정도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지켜보거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근처의 아주머니들은 “어떡해”, “신고했어?”, “119 이미 불렀어요”를 반복했다.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119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여성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도록 머리를 지지하고 수건을 대주는 사람은 이미 있었고, 주변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기에 내가 남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으면서 사고의 현장을 멀뚱히 구경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간질 환자를 돕는 사람은 일부였다. 나머지는 타인의 어깨에 자신을 흐릿하게 감추고 TV 화면을 구경하듯 시선을 내려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도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바로 옆에서 기웃거리거나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기만 했다. “불쌍해, 어떡해…”라고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불필요한 동정이자 말뿐인 연민이었다. "불쌍해.. "라고 말하며 여성을 구경하는 것은 이 상황을 단 1%도 낫게 만들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로 함께하거나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적어도 동물원 우리 안을 구경하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엄마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아 멀리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계산된 무관심이 인간에 대한 존중을 더 보여주기도 한다. 김원영 변호사는 그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존엄>에서 인간은 존엄하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존엄한 대상으로 존중하고 화답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비로소 존엄한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진실로 존엄한 존재가 된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아이가 없는 대학 동기 앞에서 육아가 화제가 되었을 때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친구, 시한부 선고를 받은 가족 앞에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들, 카페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 자폐 아동에게 무관심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책으로 눈길을 돌리는 대학생. … 자폐 아동의 부모는 소란 속에서도 태연히 책을 읽는 대학생이 무관심한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안다.
-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자폐 아동을 보는 대학생의 무관심은 계산된 것이지만 이런 무관심이야말로 개인을 구경거리가 아닌 존엄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묵언의 퍼포먼스다. 타인의 비극이나 사고를 대하는 성숙한 태도 역시 잠깐의 호기심을 접어두고 존엄한 인격체로 존중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기꺼이 수행하는 것이다. 타인을 존중하는 것보다 개인의 호기심이 더 중요할 때 우리는 다른 구경꾼의 어깨에 숨어 같이 구경하는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날 나는 함께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타인과 함께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더불어 사는 행위에는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쌍방향의 소통이 필요하다. 우리는 멀리서도 타인을 존중할 수 있고, 바로 옆에서도 남의 일인 양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도 있다. 구경하지 않는 자세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적어도 구경할 거라면,“걱정이 된다"는 핑계라도 대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