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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Jun 08. 2019

단 하나의 연주곡이면 된다

우쿨렐레와 여행


캐리어 속에 우쿨렐레를 넣고 

미얀마에 도착했다


드디어 미얀마에 도착했다. 조지 오웰에게 자극을 받아 결국 이 축축하고 오묘한 나라에 왔다. 도착 후 얼마간은 숙소와 근처를 주위에서 빈둥거리며 긴 여행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느지막이 아침에 일어나서는 다이닝 룸에서 커피와 조식을 먹으며 우쿨렐레를 더듬더듬 쳤다. 가끔 밖에 나갈 때는 미얀마의 천연 자외선 차단제인 타나카를 볼과 코, 이마에 쓱 바르고 나갔다. 그러다 다시 지겨우면 방 안에서 우쿨렐레를 쳤다. 나의 첫 방은 해가 잘 비추지 않고 와이파이도 잘 터지지 않았다. 조용한 방 안에 무료함을 느낄 때마다 우쿨렐레를 목에 걸었다. 


여행 초반에는 생각보다 심심한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아마 혼자 여행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여행 며칠 만에 우쿨렐레를 가져온 것을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쿨렐레 연습에 재미가 들린 나는, 삼각대를 책상에 설치해 영상을 찍어보기도 했다. 영상으로 들리는 내 목소리가 어색해서 바로 꺼버리긴 했지만... 



우쿨렐레를 치곤 했던 숙소의 다이닝 룸
해가 잘 안 비추는 나의 첫 미얀마 숙소
다이닝룸의 창 밖으론 이런 광경이 보인다



단 하나의 

연주곡이면 된다


어제는 P에게 전화가 왔다. 우쿨렐레 연습 중에 전화가 온 참이라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쿨렐레 연습 많이 해서 많이 쳐도 손가락이 안 아파”


벌써 굳은살이 박혔나? 그래도 연습하니까 익숙해졌긴 한가 보네-하며 나는 한껏 우쭐해졌다. P에게 “내 인생 평생 이렇게 뭔가 열심히 해본 적이 있었나 싶다”라고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제대로 된 방식으로 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아플 일이 없었다. 피트니스 운동을 제대로 된 자세로 하면 근육이 당기고 아픈 것처럼, 우쿨렐레 연주도 올바른 자세로 연주를 하면 기타를 치는 것처럼 알이 배기고 굳은살이 배긴다. 나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게 세게 내리치고 소리가 잘난다고 착각 했고, 손톱을 깎고, 손거스러미를 잘라서 연주하기가 편해진 것을 보고 단기간에 성장했다고 넘겨 짚었다. 사실 나는 “굳은살이 박혀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몰입한 적이 없다. 


취미 드로잉을 배울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수채화를 배울 때였다. 드로잉을 하려면 우선 그리려는 대상을 충분히 관찰해야 하고, 그리고 싶은 부분을 펜으로 조심히 그리고(드로잉은 연필이 아니라 펜으로 한다. 지울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더 유심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색을 섞어 만든 수채화 물감에 물을 묻혀 레이아웃을 채워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채화를 덧칠할 땐 이전에 덧칠한 것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레이아웃 안에 물감을 채우고 기다리는 과정이 너무 지루했다. 물이 마르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귀찮고, 레이아웃 안을 꼼꼼하게 채우는 것도 번거로워서 마르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했다. 아직 젖어있는 종이에 색을 더하니 색들은 펜으로 그린 선을 지저분하게 넘어갔다. 그렇게 완성한 내 그림을 보고 선생님은 말했다. “00 씨는 이렇게 그리는 게 매력이긴 한데... 조금 더 선 안을 꼼꼼히 채워 그려보세요. 그럼 더 예쁠 거예요.” 실제로 선생님 말을 따라 한 그림은 훨씬 내 마음에 들었다. 완성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완성도가 없는 것을 나의 ‘화풍’으로 둘러댄 시간들. 대충 하는 것을 성격이나 개성 탓 해온 나날들. 취미 생활을 할 때도 나는 그렇게 나를 속여왔다. 그런 내게도 미친 듯이 몰입했을 때가 한 번 있다. 피아노 학원에서 'Bravissimo maestro’를 연습할 때였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보고 피아노에 빠진 나는 그 곡 하나만을 위해 피아노 학원에 찾아갔다. 어느 날은 7시간 동안 그 연주곡만 연습한 날도 있었다. 좋아하는 일에 그렇게 오래 집중해본 적은 난생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곡은 아직도 악보 없이도 저절로 나오는 단 하나의 곡이다.


살면서 모든 것에 완성도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그런 건 딱 하나만 있어도 된다.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만 있어도 자신감이 생긴다. 단 하나의 연주곡, 단 하나의 드로잉, 단 하나의 우쿨렐레 곡. 그거면 충분하다. 신기한 것은, 제대로 가는 길을 하나만 알면 지름길을 알기도 더 쉬워진다는 것이다. 지름길에만 만족하면 절대로 원래의 길을 알 수 없지만, 단 하나의 완벽한 길은 수많은 지름길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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