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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Apr 01. 2020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우쿨렐레

7. 우쿨렐레와 부상

우쿨렐레를 가장 열심히 연습했던 때는 2018년 가을, 태국 빠이에 머물 때다. 하루의 일정이란 늦은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산책하고 글 쓰는 게 전부였던 느긋한 시간이었다. 가끔 무료함이 찾아올 때는 우쿨렐레 스트랩을 목에 매고 구글에 악보를 검색했다. 우쿨렐레 연주 실력을 늘리는 것보다 좋아하는 노래를 직접 부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부르고 싶은 노래가 많아질수록, 연주하기는 어려워졌다. 특히 남자 가수의 노래를 부르고 싶을 때가 난감했다. 음역대를 옮기면 코드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빠이에서 머무는 무료한 시간이 늘어갈수록, ‘카포’의 중요성을 느끼게 됐다. 조옮김을 해주는 도구인 카포를 활용하면 우쿨렐레도 기타처럼 간단하게 음정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태국의 산골 마을에서 카포를 구할만한 곳은 마땅치 않았다. 며칠간 카포를 구할 방법을 찾아보다가, 집에서 손쉽게 임시 카포를 만들 수 있다는 인터넷 게시글을 보게 됐다. 나무젓가락과 고무줄을 활용해 임시 방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우쿨렐레 지판의 줄을 카포 손잡이 대신 나무젓가락으로 누를 수 있도록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캐리어에 굴러다니는 연필 하나와 검은 고무줄을 이용해 간이 카포를 만들어 연주를 하니 그럴싸했다. 정확하게 줄을 누르지 못해 음정이 약간 어긋났지만 취미 생활로 연주하는 데는 이 정도로 적당했다. 간이 카포를 만든 이후, 확실히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많아졌다. 음역에 딱 맞는 노래를 찾지 못해도, 카포만 있으면 어떤 노래든 대충 코드를 잡을 수 있으니 연주의 영역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야시장에서 우연히 악기점을 발견해 우쿨렐레용 카포를 살 수 있었다. 역시 진짜 카포는 달랐다. 음정도 더 잘 맞고 깔끔한 소리가 났다. 어쩐지 직접 만든 간이 카포를 만들었을 때보다 흥이 안 나는 게 이상했지만. 


진짜 카포(좌)와 내가 만든 간이 카포(우)


여행 중에는 한 번 이런 일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태국에 있던 때였다. 조금 작은 바지를 억지로 입고 벗으려던 참이었다. 땀도 차서 잘 내려가지 않아 발버둥을 치다가 억지로 내리려는데 바지는 안 내려가고 엄지 손가락만 뒤로 꺾였다. 순식간에 손은 퉁퉁 붓고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느껴졌다. 파스와 붕대를 사고 얼음찜질을 한 끝에 다음날쯤엔 괜찮아졌다.


웃긴 것은 손을 다치자마자 한 생각은 “우쿨렐레 어떻게 치지”였다. 그렇게 열심히 한 적 없었으면서. 붕대를 감고 우쿨렐레를 칠 수 있는 시뮬레이션도 머릿속으로 돌렸다. 스트랩으로 우쿨렐레를 목에 걸고, 붕대로 엄지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면 나머지 손가락으로 쉬운 비트 정도는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지 내리다 손 다친 것도 우스운데, 다치자자마 우쿨렐레 연주가 하고 싶어 지는 청개구리 같은 모습은 뭔가 싶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결핍이 여행지에서의 연주를 더 즐겁게 해주었던게 아닐까 생각한다. 정말 우쿨렐레를 간절히 치고 싶어서 간이 카포를 만들고 붕대를 감은 게 아니라, 그런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이가 없어서 잇몸으로 우쿨렐레를 친 게 아니라, 잇몸밖에 없는 그 상황마저도 흥미로워진 것이다. 그건 무료한 여행자가 느낄 수 있는 게으른 사치였다. 


고작 악보를 구하지 못하는 것 정도도 장기 여행자에게는 일상의 변주가 된다. 여행자의 결핍은 쉽게 로망이 되고, 해결해야 하는 미션이 된다. 그 로망은 귀국과 함께 마법처럼 사라진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언제든 쉽게 우쿨렐레 부자재와 적당한 키의 악보를 구할 수 있고, 안 맞는 바지를 입고 손이 꺾일 일도 없다. 그러나 어쩐지 우쿨렐레 자체를 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행지에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파 볼 필요가 있다. 그때 그 시간, 그 장소가 아니라면 곧 사라질, 유효기간이 정해진 말랑말랑한 감정일테니까. 



매거진 <캐리어 속 우쿨렐레>는 퇴사 후 1년간 낯선 곳을 떠도는 내향적 여행자가 방 밖을 나가기는커녕 우쿨렐레와 제일 친해지는 과정을 담은 삼삼한 여행 에세이입니다. 우쿨렐레 권태기를 지날 즈음, 글쓰기를 핑계로 어려운 주법도 연습하고 완곡 커버로 유튜브 데뷔도 하겠다는 조금은 당찬 포부로 씁니다. 비정기적으로 연재 예정! 첫 번째 화를 보시려면 ☞이 곳으로 

죽지 않고 찾아온 우쿨렐레 매거진 ,,, 5년 정도 치면 고수가 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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