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에세이> 8월호 독자 기고
경지를 안 지는 2년도 채 안됐다. 2017년에 경지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나는 방콕의 수상가옥에서 한가하게 여름휴가를 즐기는 중이었다. 경지는 나의 첫인상을 언제나 그렇게 회상한다. 신입사원으로 첨 팀에 배치받았는데 몇 주간 자리를 비우고 얼굴도 안 보이는 어떤 선배, 여름휴가가 한창 지난 시즌에 혼자 여행을 가고, 그림을 그린다는 선배. 실상의 나는 그렇게 멋진 사람이 아니기에 누군가의 첫인상 속 내 모습이 동화 속 베짱이 같은 게 좋았다. 첫인상이라는 것은 평생 변하지 않는 것이니까.
나는 경지의 허를 찌르는 유머 감각이나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을 뛰어넘는 언어유희 능력, 일희일비하는 나와는 다르게 침착하고 유연하게 업무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럼에도 누군가 뒷담화 할 때는 핵심을 놓치지 않고 한 방 제대로 내리꽂는 여러 가지 면모를 좋아했지만 우리의 우정은 수직적인 기업의 기수 문화를 이길 수는 없었다. 우리는 동갑이었지만 내가 경지보다 2년 일찍 입사한 탓에 경지는 내가 몇 번이나 말을 놓자고 해도 기어이 선배님이라 불렀다. 경지는 내가 퇴사하기 직전에야 말을 놓았다.
경지랑은 내가 퇴사할 무렵부터 급격하게 친해졌다. 나는 경지가 나의 어떤 부분, 내가 회사에서 부적응자 혹은 반동분자로 찍히거나,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처럼 구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재능처럼 생각해주는 게 좋았다. 내가 독립출판을 하고 책을 입고하러 다닐 때, 경지는 새로 뽑은 푸른색 자가용을 타고 나의 기사 노릇을 자처해줬다. 대기업에 다니는 예쁜 여자의 차를 얻어 타고 책을 입고하며 뷔페를 얻어먹는 나의 신세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딱 균형적인 조합이라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경지는 뭣도 없는 나를 가우디처럼 대해주는 구엘이었다. 나의 작은 보답은 동네 서점을 배경으로 경지를 예쁘게 찍어주는 것이었다.
언젠가 경지는 나를 건더기라고 불렀다. 밀가루처럼 남는 것 없이 가볍게 채에 걸러지는 사람만 보다가, 나를 만나면 수제비처럼 건더기가 많이 남아 좋다고 했다. 나는 시인 같은 경지의 말이 좋아서 이렇게 혼자 편지를 쓴다. 나에게 경지는 다시마와 대왕 멸치로 푹 우린,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먼저 생각나는 멸치 육수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는 잘 맞는 거라고. 넌 건더기는 아니지만 내게는 멸치국물이 가장 필요하다고.
배려있는 척 하지만 호의를 계산하는 이기적인 나를, 그런 생각이 든 것 마저도 부끄럽게 만드는 높고 넓은 사람들이 있다. 경지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들에게 몇 번 씩이나 작은 마음을 들키고, 깨지고, 부끄러워진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나는 가끔 의문이 든다.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니, 뭔가 잘못됐어. 사실 내가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것 아닐까?” 목적 없는 애정에 서툰 탓에 분필로 금을 그리고 거리를 둔다. 그들은 그것마저 섭섭하다고 성큼 다가와 모래선을 가뿐히 발로 지운다.
경지는 오늘 저녁에 소개팅이 있다. 새 신발을 사서 소개팅에 갈 거라며 일부러 버릴 신발을 신고 온 경지와 브런치를 먹고 지하상가에 갔다. 나는 내 샌들 안 산지도 일 년 반이 넘어가는 주제에 호들갑을 떨며 경지 신발을 대신 골라주었다. "이게 이쁘다. 이거 다른 색 있어요? 245로 하나 주세요. 사장님 현금 할인해주시죠? 쫌만 더 깎아주세요. 얘 오늘 소개팅이라서요." 내가 경지를 발은 있고 입은 없는 애처럼 대하니 사장님은 경지에게 신발을 신겨주며 웃었다.
“친구죠? 딱 봐도 절친이네 절친이죠?”
“네 절친이죠”
만족스러운 쇼핑을 끝내고 나는 안 그런 척 생색을 부리며 경지에게 "잘 샀지?" 묻는다. 그러면 경지는 "어. 너 덕분에 잘 샀다. 자신감이 생긴다 막."하고 웃는다. 나는 엎드려 절 받은 그 말이 좋아서 버블티라도 사줄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내가 먹고 싶었던 거지만 아무튼.
“야 우리 절친 아니고 회사 동료라고 했어야지”
“그러게 우리 완전 직장 선후배 사이인데.”
“응 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