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러버의 죄책감
Day28/ Chiang Mai, Thailand / 9.17
시간이 많아지면 새로운 책을 사서 읽을 줄 알았는데,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본다. 특히 과거 종이책으로 읽었던 책들은 전자책으로 사서 다시 본다. 무작위 인풋보다야 깊게 알아가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이 여행의 긍정적인 점 중 하나다.
요즘 책을 읽을 때는 크레마 리더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핸드폰으로 읽는다. 로딩 시간이 길고, 인상적인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하기엔 전자 잉크보다야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훨씬 빠르고 선명하다.
이십만원이나 주고 산 비싼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 든다. 내가 가진 물건을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용도로 사용>하지 않을 때 드는 죄책감이다. (물론 최고의 물건은 <쓸모없고 귀여운 물건>이지만,) 여행자인 나는 그런 물건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각자 하나 이상의 용도가 뚜렷한 물건들을 지니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대놓고 용도를 위해 나온 도구(리더기)를 사용하지 않고, 서브로 용도를 제공하는 도구(핸드폰)을 사용하니까 죄책감이 드는거다. 아니 근데 이 죄책감의 대상이 누구지? 리더기? 리더기를 살때 돈을 지불한 과거의 나?
핸드폰으로 책을 읽으면 갖가지 딴짓으로부터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하지만 핸드폰 독서의 장점도 있다. 나는 한가지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 책을 읽다 생각나는 것은 바로 검색을 해야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바로 메모를 해야한다. 그럴 땐 이북 리더기보다 핸드폰이 훨씬 유용하다. 중요한 것은 사용하기 적절한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다. 도구를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다. 비싸게 주고 안쓰고 놀린다고 죄책감 갖지 말것.
오늘도 느끼는 거지만, 나의 글은 내가 내게 부여한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 변명의 총체다. 좋게 말해 성찰, 한마디로 자기합리화. 나는 자기합리화를 매우 잘하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