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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Oct 05. 2018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에게서 얻은 교훈

최근에 글을 쓰려 노트북을 챙겨 카페에 나와도 딱히 쓸 게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보통은 이러지 않았다. 쓸 것이 넘쳐서 다 못쓰는게 문제였지, 아이폰 메모장에도 쓰지 못한 소재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아무리 뒤져도 쓸 것이 없다. 처음엔 무료한 일상 탓을 했다. 여행이 점차 안정기에 들어가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되니 딱히 꺼내어 쓸 말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혹은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고 갈등 요인이 없는 삶을 살고 있어서 재밌는 소재가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


엄밀히 생각해보면 쓸 것이 없지는 않았다. 낙태와 성매매에 대해서도 쓰고 싶고, 병역과 군사주의에 대해서도 쓰고 싶고, 몸에 대해서도,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서도 쓰고 싶고, 민족주의와 난민에 대해서도, 사이버 네트워크에 대해서도, 탈식민성에 대해서도 쓰고 싶다. 다만 그것을 심도있게 다룰 만큼 내가 충분히 공부하지 않았고, 그것과 자연스럽게 엮을 나의 경험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필히 개인의 경험과 사유가 녹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쓸 게 없다기 보단, 쓸 용기가 나지 않는 나날이다. 실컷 쓰려고 여행을 왔는데 말이다.


그러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조지오웰에 글을 통해, 나는 왜 글을 쓰는지-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다. 조지 오웰의 산문집 <나는 왜 쓰는가>는 오랜 세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생계를 꾸려간 그가 쓴 에세이, 칼럼, 서평 29편을 묶은 책이다. 그의 책에서 그는 본인이 글을 쓰는 동기에 대해 말한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나는 새로운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러면서도 미학적이고 지적인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는 글. 정치적이지만 미학적인 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치열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글. 조지 오웰의 글을 읽을 때마다 한 수 배운다. 내가 미얀마를 첫번째 여행 국가로 정한 이유도 조지 오웰의 글 때문이었으니, 나는 그에게 여러모로 빚을 진 셈이다.




어떤 면에서 3년 간의 회사 경험은 넓은 의미의 '정치적' 글쓰기를 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나는 그저 내가 겪은 것들을 술술 풀어놓으면 그만이었다. 특히 내가 책을 만들며 담고 싶었던 메시지는 조금 더 정치적이었다. 출판사나, 미디어, 특히 브런치에서, '퇴사'는 매우 흔하지만 언제나 잘 팔리는 아이템이다. 왜 우리는 타인의 퇴사를 궁금해하는가? 내가 퇴사한 이유는 내가 부적응자이기 때문이가? 아니면 회사가 별로이기 때문인가?  왜 우리 사회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퇴사하고 방황하는가?  


결국 다수가 직업과 직무에 대해 충분한 고민없이 취업하는 시대, 시스템, 제도를 건드리지 않고는 퇴사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할 수 없다. 회사를 다닐 때의 글쓰기는 내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정치적인 글쓰기가 되었다.(물론 책을 만들 때는 이런 의도를 충분히 담지 못해 아쉽다. 아쉬운 대로 제목이라도 어필하려고 했다. 결국 퇴사할 수밖에 없는"공채형 인간".)


회사라는 곳을 벗어난 지금, 내가 속한 조직은 없다. 그리고 무소속인 지금이야말로 모든 조직에 속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다.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모르는 고통에 대해서도 기꺼이 찾아보고 동참하려는 연대 의식과 공감일 것이다. 대개 내가 열등감을 느껴온 부류는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총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처럼 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들과 조우했을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실험적인 삶을 살고 혁신적인 글을 쓰자." 


퇴사 후 버킷리스트로 적었던 것 중 하나다. 퇴사한 지 90일이 다되갈 지금, 무엇이 실험적인 삶이고, 무엇이 혁신적인 글인지 다시 고민해본다. 밖으로 나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외국인 친구를 만나고 스릴 넘치는 여행을 하는 것? 물론 그런 용기도 나에겐 매우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실험과 혁신은 보다 큰 범위의 무언가다. 나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나만의 편향이 담겨 있는 삶, 그러면서도 개인의 삶이 가진 소소한 재미를 놓치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살고 그런 글을 쓰고싶다. 그것이 내게 가장 실험적이라 믿는다.


나는 왜 쓰는가. 허세 가득한 질문에 조지 오웰의 문장을 빌려 마지막으로 대답하겠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표지의 그림은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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