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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Nov 03. 2018

디지털 디톡스 실패 후기

로그아웃에 실패하셨습니다

1.
 

여행이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익숙한 일상같은 여행에 무료함을 조금 느낄때 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시도하고 싶었다. 그러다 피코 라이어의 "The art of stillness"라는 테드 영상을 보았다.

 

가속의 시대에서는 천천히 가는 것보다 흥분되는 것은 없고, 
주의산만함의 시대에서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큼 호사스러운 것이 없다.
끊임없는 움직임의 시대에서, 조용히 앉아 명상하는 것만큼 긴급한 것은 없다.


https://www.ted.com/talks/pico_iyer_the_art_of_stillness 

 

가속의 시대에서 주의산만함으로는 남부럽지 않은 나를 설레게 하는 말이었다. 비록 나는 핸드폰 사용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스티브 잡스의 자식들도 아니고 인터넷 안식일을 주기적으로 갖는다는 실리콘밸리 개발자들도 아니지만, 그들의 룰을 따라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자고 다짐했다. 하루 정도는 쉽지 않을까. 딱 하루만, 핸드폰, 맥북, 이북리더기, 블루투스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고 아날로그적 삶으로 돌아가볼 것. 그런 마음으로 10월 14일, 디지털 디톡스를 선언하는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포스팅 @mekong.soul



 

2.

아날로그 데이를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는 전날 미리 준비해야할 것들이 있었다. 우선 기사 보기, 테드 보기 등 핸드폰과 컴퓨터로 하던 컨텐츠 탐색을 하지 못할테니 그간 읽기를 게을리 해온 종이책들을 준비해두었다. 또 우쿨렐레 연습을 하기 위해서 컴퓨터에 저장된 악보를 미리 수첩에 적어두어야 했다. 디톡스 후기를 수시로 적을 노트와 펜도 노트도 준비했다. 


그러다 달력을 보고 문제를 하나 발견했다. 알고보니 디지털 디톡스를 하려던 날은 엄마 생일이었다. 음력 생일이라 달력에 저장해두고 잊고 있다가 하필 디톡스를 시작하는 전날 달력을 보고 알게된 것이다. 나는 모든 준비 작업을 끝내고 마음의 준비까지 마쳤기 때문에 엄마 생일이라고 이걸 무를 수가 없었다. 물론 나 혼자 하는 거니까 언제든 날짜를 바꿔도 상관 없었지만, 인스타에 당당하게 글도 올린 마당에 구구절절 취소하는 것이 민망했다. (물론 아무도 이걸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서 딱 한번, 엄마에게 전화하는 예외를 두기로 했다. 백수의 단발성 프로젝트보다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것이 더 중요하니까. 맞아요. 이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삐걱대고 있었다.. 


대망의 당일.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핸드폰은 잠시 베개 밑에 감춰두고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를 할 때는 손을 분주히 움직여야 하니까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게 아쉽긴 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우쿨렐레를 치고, 침대에 누워 5분간 명상을 하고…. 두 시간도 안되서 빠르게 금단현상이 오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한번만 보고 싶다, 트위터 한번만 보고싶다...


금단 현상의 첫번째 단계는 나를 욕하는 것이다.

“ㅅㅂ 나는 핸드폰이랑 맥북을 할때가 행복한데 왜 이딴 것을 하겠다고 한거야?” 

두번째 단계는 나를 설득하는 것이다. 

“내가 세운 목표니까 내가 깨도 된다”
“디지털 디톡스 안한다고 세상 안망해”

세번째 단계는 프로젝트 규칙을 변형하는 것이다 

“아예 안하는건 힘드니까 한시간에 한번씩 오분만 쓰게하는건 어때? "


가장 땡겼던 것은 트위터였다. 덕질이란 언제 어떤 떡밥이 뜰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방탄소년단 팬이다.) 내가 이렇게 핸드폰을 보지 못하는 사이 대형 떡밥이 뜨면 어떡하지? 나만 이미 다 끝난 떡밥에 뒷북치며 환호하게 되면 어떡하냔 말이야? 내가 인스타그램이나 브런치에 올린 글들의 반응과 알람도 궁금했다. 그렇게 잠깐씩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결국 때려쳤다. 3시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본 트위터엔 세상을 놀래킬만한 이야긴 없었다. 


 

 

3.

나는 과하게 인터넷 중독을 비판하는 것들에 시큰둥한 편이다. 어떤 연구 결과는 핸드폰 중독 증상을 보인 중고생들은 하루 3시간 38분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기사를 보고 나는 “3시간 반이면.. 괜찮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난 요즘 시대에 ADHD는 비염같은 현대인의 필수 질병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세 시간만에 실패한 디지털 디톡스의 결과에 자괴감에 빠진 나는 내가 디지털 기기에 중독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디지털 중독이 디폴트인 일상생활에서 디톡스를 계속해서 시도하기란 쉽지 않다. 아날로그의 귀환도 내가 백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회사 다닐때는 아침에 도시락 신청도, 셔틀버스 QR코드 승인도, 사내 인프라 OTP 접속도 모두 핸드폰이 있어야 가능했다. 핸드폰이 없는 자들은 생활조차 할 수 없는 환경에서 디지털 디톡스를 할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같은 중독자들에게 제안한다. 디지털 디톡스를 하루 중 일정 시간에만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디지털 기기를 무작정 줄이기 보단, 잠깐의 아날로그 아워를 통해 디톡스의 좋은 점만 쏙쏙 가져다 쓰는건 어떨까? 


디지털 기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없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즐기는 것.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잠깐의 디톡스를 통해 깨달은 것은, 내가 우선순위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쉬운 것부터 해치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끔은 펜으로 직접 필기를 하거나, 종이책을 읽는 행위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도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하는 작업을 먼저 하곤했다. 작업을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전환하는데도 일정한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한데, 그게 귀찮아서 편한 디지털 작업만 계속 해온 것이다. 

 

그러니 디톡스 초보자라면, 하루에 한시간만 따로 떼어 디지털 디톡스를 시도해보자. 예컨대 퇴근하고 집에오는 순간부터 2시간만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는 것이다. 씻고, 요리를 하고, 오롯이 저녁 식사에 집중해서 한 끼를 먹고, 남은 한 시간동안 미뤄둔 책을 읽어 보자. 보통의 나는 밥먹으며 트위터하다 곧바로 침대에 누워 두시간 내내 트위터만 한 적도 있으니까, 이건 꽤 괜찮은 방법이 분명하다. 


나처럼 무모하게 처음부터 24시간씩 도전하지 말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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