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첫 선물
1.
여행을 한지 50일만에 처음으로 내 책을 준 사람이 생겼다. 나는 여행을 오기 전에 친구의 조언대로 캐리어에 내 독립출판물(모르시는 분들을 위해..'공채형 인간'이라고..)을 10권을 챙겨왔다.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책은 바깥구경은 커녕 캐리어에 처박혀져있어서 나는 괜히 짐만 늘렸다는 약간의 후회를 하고 있었다. 회의감도 들었다. 이걸 여기서 누가 읽지.. 친구는 본인 밴드의 앨범을 들고 다녔다고 했는데, 원래 음악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통하는 만국 공용어니까. 하지만.. 그림이나 사진 하나 없이 한글로만 빼곡히 채워진 이 책을 처음 줄 사람이 누구일지, 나는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막연히 한국 사람이 아닐까 생각 했다.
하지만 오늘 책을 준 사람은 태국인 ‘노트’였다. 우리는 서로의 책을 교환하기로 했다. 나는 한국어로 쓰여진 에세이를, 노트는 태국어로 쓰여진 시집을.
2.
별 생각없이 신청한 북바인딩 워크샵에서 만난 노트는 노트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장님이다. 이 어디 운명론적인 이름인가? 이틀 전 생일을 맞이한 32살의 노트는 7년 동안 다닌 안정적인 은행을 그만두고 치앙마이에 와서 북 스튜디오를 차렸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다양한 사이드잡을 함께 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나는 노트에게 내가 딱 너의 삶을 뒤이어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짧은 영어였지만 하고 싶은 말이 서로 너무 많은 나머지 제본은 손도 대지 않고 커피숍에서 한 시간 수다를 떨었다. 왜 일을 그만 두었는지, 퇴사를 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플랜 B를 준비했었는지, 프리랜서로 사는 삶이 어떤지, 자신의 불안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가족은 어떻게 나를 지지해줬는지.. 그리고 지금 행복한지.
본격적으로 북 바인딩을 시작하고 깨달은 것은 오랜만에 핸드폰을 보지 않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실과 바늘을 통해 노트를 만드는 작업은 단순 작업이 반복되지만 힘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마치 명상처럼. 처음에는 노트의 도움을 받아 같이 만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나 혼자 스티치를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내가 더디게 실을 종이에 꿰매는 동안 노트는 본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긴 에세이를 영어로 번역해 읽어주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게 있으면 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왜 하는지 항상 생각해야 하고, 흥미가 없어지면 바로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최근에 쓴 에세이의 결론이었다.
예술을 사랑하고, 노트를 만들고, 글을 사랑하는 사람. 혹시 책도 썼니? 물어보니 시를 쓴다면서, 다음주에 직접 만든 시집이 완성된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책을 교환하기로 했다. 사실 가져갔던 내 책을 먼저 주긴 했지만. 서로의 책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상관없었다. 다음주에는 노트의 시집을 받으러 다시 그의 스튜디오에 갈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사는 사람을 많이 마주친다. 노트는 나의 미래를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편 며칠 전 코워킹 스페이스에서는 한국인 여성 두분을 만났다. 집에 갈때쯤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는데, 처음엔 수줍게 내 인사를 받아주던 그 분들이 내가 퇴사를 하고 백수 상태로 이곳에 왔다고 하니 반갑게 소리를 지르며 손을 맞잡았다. 비슷한 현재를 살고 있다는 동질감 같은걸 느낀걸까. 그리고 요즘 가장 즐거운 소식은 주변 사람들의 퇴사 소식이다. 특히나 퇴사하고 치앙마이에 온다고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이곳 치앙마이에는 미래와 현재, 과거의 내가 모두 있다.
이곳에는 미래와 현재, 과거의 내가 모두 있다.
3.
바인딩 수업이 끝나고나선 근처 카페인 마하사뭇 라이브러리에도 책을 한권 두고 왔다. 누군가 읽어줬으면 해서. 특히 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한국 사람이. 나랑 비슷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는 사람이 우연히 나의 글을 발견하고, 공감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노트에게 책을 준 이유는 전혀 달랐다. 서로 각자의 글을 전혀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각자 삶에 대한 공감, 새로운 인연에 대한 감사, 앞으로의 삶에 대한 존중의 의미였다. 이렇게 각기 다른 이유로 두 권의 책을 치앙마이에 남겼다.
치앙마이를 떠날때는 가장 자주 갔던 코워킹 스페이스, ‘Addicted to work’에 책을 한권 두고 올 것이다. 매일 여기서 저녁을 여기서 먹고, 돈이 부족하면 외상도 해준다. 뭘믿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여긴. 이제는 이곳이 거의 집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정말 좋아하는 장소가 생기거나, 정말 주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책을 주고 와야지. 벌써 남은 내 책 8권이 적게만 느껴진다.
4.
타지에서 처음 만난 인연에게 나의 책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사실 요즘엔 모든 주제로 책을 만들고 싶다. 노트는 내게 장난스레 다음엔 그림과 사진이 실린 매거진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인쇄소에 갈 것이다. 그때는 풀칼라로 인쇄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