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포르투(Porto)와 해리포터
며칠 전에 포르투의 렐루 서점lello bookstore을 다녀왔다. 1906년 개업한 신고딕과 아르누보 풍의 이 서점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도 알려져있다. 무엇보다 조앤.K.롤링이 <해리포터> 시리즈의 영감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 탓에 서점인데도 5유로 하는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야하고, 짐도 따로 카운터에 맡겨야한다. 그렇게 들어간 서점은 빈티지하고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보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가득찬 계단이 먼저 보인다.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계단으로 북적이는 이 서점에서 10분 이상 있기 어렵다. 그 탓에 SNS나 구글맵 후기에는 항상 실망스럽다는 후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해리포터 키즈”에게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이 계단이 마법사의 돌에 나왔던 바로 그 움직이는 계단의 모티브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면 말이다. 해리포터 너드 중의 한 명으로서 “해리포터 키즈”를 감히 정의하자면, 90년대에 태어나 해리포터를 보고 자란 세대라고 명명하겠다. 남녀노소 모두가 사랑한 시리즈물인데 왜 하필 90년대생이냐면, 이때 해리포터를 본 세대는 해리와 유년을 같이 보내고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세대는 내 인생은 모두 거짓이고 나는 머글이 아니라 마법사일지도 모른다고 믿은 세대다. 굴뚝도 우체통도 없으면서 부엉이가 편지를 가져다 줄 거란 희망을 가졌던 세대다. 번역을 기다릴 필요 없이 해리포터를 읽는 영미권 사람을 부러워하며 왜 내 모국어는 한국어인가 울부짖었던 세대다. 원서로 두꺼운 양장본을 먼저 사서는 마법 용어를 읽겠다고 용을 쓴 세대다. 가장 먼저 번역본을 읽기 위해 주변인들에게 수소문해 한국어판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가장 먼저 읽었던 세대다. 모든 책과 영화의 DVD 소장은 기본, 갑분싸 주문을 외치고, 끼니마다 만화책 보듯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온갖 반찬을 흘리며 읽는 바람에 엄마에게 등짝을 맞는 바로 그 세대다.
누군가 유년 시절의 기억은 죽기 전까지 삶에 영향을 주는 정서의 창고라고 했다. 99년도 문학수첩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출간되고 2007년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이 완결되어 해리가 마법 세계를 구할 때까지, 우리는 롤링의 세계관 속에서 해리, 론, 헤르미온느와 함께 자랐다. 그런 점에서 해리포터 키즈를 구성하는 성분은 수분과 어느 정도의 폴리주스*다. 이 분야 끝판왕, 헐리우드 대표 해리포터 키즈 에즈라 밀러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스핀오프격인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에 출연하는 ‘성덕’이기도 하다. 그도 92년생.
어제는 롤링이 글을 쓰고 호그와트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던 마제스틱 카페Majestic cafe에 들렸다. 낮에는 사람이 많아서 갈 엄두가 안났는데, 저녁에 길거리를 걷다 영업 종료 1시간 전 쯤 들어가니 나름 한적했다. 친절한 종업원에게 추천을 받아 드라이한 포르투갈산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과 이 곳의 명물이라는 달콤한 프렌치토스트를 먹으며 카페의 디테일을 요리조리 뜯어봤다. 롤링 여사가 이 디테일에 감명을 받아 호그와트라는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짜릿해졌다. 제가 여행지의 아름다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 건조한 사람이라는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이 곳에 앉아 죽음의 성물 마지막 장면에서 볼드모트로부터 호그와트를 지키기 위해 '프로테고 막시마*'를 쏘아올리던 맥고나걸 교수와 몰리 위즐리를 떠올리는 나는, 몰아치는 감상에 간신히 버티고 서있는 일개 덕후 한 명이었다.
어쩐지 포르투의 모든 카페와 서점은 이 곳이 조앤 롤링이 영감을 받은 곳이라고 말한다. 입장권 5유로가 무색하게 사람들 등에 떠밀려 쫒겨나는 이 곳의 관광지들은 해리포터를 마케팅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렐루 서점에 가고, 마제스틱 카페에 가고, 망토를 입은 학생을 보러 코임브라 대학에 가는 이유는 그 곳에서 우리의 유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더 좋은 것은, 눈을 반짝이며 동행들에게 조잘대는 나같은 해리포터 키즈를 마주한다는 것. 이곳 포르투에서 나는 비슷한 연배인, 다양한 국적의 해리포터 키즈들을 수없이 마주한다. 나는 거기서 펜시브*처럼 유년을 한 줄기 꺼낸다.
해리가 죽음의 성물을 차지하고 마법 세계를 구할 때쯤 나는 삶이 그렇게 마법같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내 인생에는 이불 속에서 발차기하는 기억들을 수정해줄 오블리비아테의 주문도,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때 입을 투명 망토도, 확장 마법을 걸어 수십평의 아늑한 방으로 변하는 텐트도 없다. 다만 부동산을 걱정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9살의 어린 소녀가 20년이 지나 해리포터의 영감이 된 도시에 오다니, 이것이야말로 해리포터 키즈로 자란 머글에게는 마법같은 일 아닌가. 해리포터 키즈는 아마 영원히 해리포터 키즈일 것이다. Always… *
*폴리주스 :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해주는 마법의 약
*프로테고 막시마(Protego Maxima) : 공격을 방어하는 방패 주문의 강화 버전
*펜시브 : 기억을 저장했다가 다시 꺼내볼 수 있는 마법 물건
*Always : 우리 스네이프의 마지막 대사이자 해리포터 시리즈를 관통하는 명대사
잡담
* 해리포터 키즈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롤링여사의 세계관의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다. 삼권분립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마법부, 고작 열일곱 아이에게 구원되는 머랭쿠키처럼 연약한 마법세계..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성격별로 기숙사를 나눈다는 사고 자체가 제일 이상하다. 사회화가 필요한 학창 시절부터 비슷한 애들끼리만 묶어놓다뇨..?
*어릴 때 생각했던 것. 내가 해리와 같이 호그와트를 다녔다면, 쟤는 세계를 구하는데 나는 뭐하는가 되게 열등감에 빠졌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