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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Nov 06. 2018

태국의 느긋한 시골, 빠이

태국 빠이(Pai)의 게스트 하우스


빠이로 가는 날 나는 아침부터 숙취에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술을 먹는거라 나의 주량을 모르고 나댔더니 …. 좁은 미니밴에 불편하게 낑겨 세 시간 동안 700개가 넘는 고개를 넘으니 멀미까지 겹쳐 버렸다. 빠이에 도착한 후에도 나는 숙소에 가서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 밖에 하지 않았다. 빠이에서 처음 간 숙소는 <마나우 하우스>라는, 태국 여성분과 결혼한 한국 남성분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나는 짐도 풀지않고 침대에 누워 내리 잠을 잤다. 


빠이 숙소 '마나우 하우스'로 가는길



빠이에 도착한 이튿날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침대에만 내리 누워있던 나는 두통이 생길 때마다 앞앞뒤양옆으로 몸을 뒤집어가며 요양을 했다. 이날 게스트하우스에는 40대 한국인 여성 두분이 체크인을 했는데, 내가 죽은듯이 방에만 있자 “저 방엔 사람 없나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그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가지 않고 계속 방에 머물렀다. 그분들은 저녁에 물을 마시러 나간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이 있는줄 모르고 떠들었다면서. “괜찮습니다, 어짜피 들을 정신도 없었어요..."


사흘째가 되서야 기운을 차렸다. 드디어 숙소 밖을 나가 산책을 했고, 팟타이도 먹었고, 숙소에 묵던 여자분이랑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저녁엔 어제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두 분이 구워주는 삼겹살을 먹었다. 


여긴 고기가 진짜 싸다


잠자리가 소란스럽다는 것도 삼일째가 되서야 알았다. 창문은 모기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기능만 했고, 새벽에는 개가 코고는 소리가 내 바로 옆에서 서라운드로 들렸다. 나는 개가 마음만 먹으면 모기장을 후려치고 내 침대 위로 넘어올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아침에는 졸졸 흐르는 냇가 소리랑 아침에 우는 닭소리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그래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잠도 잘만 왔다. 회사를 다닐 때는 잠들기 전 가슴에 납을 올려둔 것 같아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어떠한가. 자기 전에 아무런 걱정 없이 바로 잠에 드는 삶. 개가 코고는 소리 정도로는 내 숙면을 방해할 수 없다.


숙소 안에서 우쿨렐레나 치는게 제일이죠..




나흘째엔 비가 왔다. 비오는 빠이는 숙소에만 처박혀 있는게 가장 좋다. 이곳 마나우 하우스는 워킹 스트리트와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 덕에 비오는 푸른 산을 바라보며 한적한 시골 뷰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이날엔 2층에 올라갈 수 있었다. 2층의 창가 테이블에는 자수가 놓인 방석과 스툴, 긴 원목 창가가 전부지만 그 어떤 카페보다도 편하고 좋은 베란다다. 장대비처럼 내려오는 빠이가 눈 안에 시원하게 담겼다. 나는 빠이의 비오는 전경을 즐기며 2층을 전세낸듯 우쿨렐레를 쳤다. 비가 장대같이 쏟아져서 노래도 목청껏 부를 수 있었다. 날씨 때문에 저절로 에코가 됐다. 


아주 편하고 아주 느긋한 빠이의 하루. 비오는 날은 비가 와서 안나간다는 핑계를 댈 수 있다는 것도 좋다. 나는 비가 안오는 화창한 날도 숙소에만 있는 날이 많지만. 이런날도 있어야지?라는 생각으로 몇십일을 늘 이렇게 보낸다. 


비오는 빠이



마나우 하우스에는 고양이 두마리와 개 세마리가 있다. 개 세마리 - 마나우(라임), 땡모(수박), 땡타이(멜론)와 고양이 두마리- 남딴(설탕), 뜨라파오(바질). 개 마나우와 고양이 남딴이가 친구처럼 엎치락 뒤치락하면 사장님은 몇 번이나 꾸러기들을 말리러 갔다. 마나우 하우스에 묵는 5일 동안 강아지와 고양이 사진을 제일 많이 찍었다. (최근 소식, 남딴이 고양이 세마리를 더 낳았다고! )




귀여운 개와 고양이들




분위기 좋은 비오는 빠이의 하루. 나를 재촉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곳은 멈추면 멈춘 대로, 흐르면 흐르는 대로 시간이 간다. 나는 오토바이도 스쿠터도 타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정말 아무것도 할게 없었는데 그래서 더 마음이 편했다. 정체에 대한 죄책감없이 몇날이고 이렇게 숙소에서 빈둥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너무 지겨우면 전기 자전거를 빌려야지. 


완벽한 이 날의 하루는 비가와서 축축한 계단에서 슬라이딩을 하면서 삐끗했다. 하지만 들고있던 맥북이 무사하니 괜찮다. 내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맥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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