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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Oct 14. 2018

당신이 떠나야할 이유는 따로 있다

(여행)의 이유


난 어쩌다 여행을 온걸까. 어쩌다가 퇴사하고 1년이나 여행을 하겠다고 마음먹은걸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내린 결정도 아니었으니 당연하다. 퇴사하기 전에는 그저 이 선택이 당연하고 적절해 보였다. 이때까지 해오던 직무를 계속 할 생각이 없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고민의 시간을 갖기에 여행보다 적절한 것이 없어 보였다. 뭘 해야할지 모르니 당연히 따라야 할 ‘시험’이나 ’채용’ 일정 같은 것도 없었고, 여행 기간도 내가 정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포부좋게 1년을 계획했다. 딱 떨어지는 숫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7월에 퇴사를 한다고 했음에도 6월이 되도록 비행기표 하나 끊지 않아서 몇명의 동기들은 내가 구라를 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같은 층에서 올해 안에 같이 나가자고 퇴사를 다짐했던 동기 한 명은 본인은 경력 면접도 보러 다니고 이직을 위한 공부도 하는데, 나는 팀도 딱히 힘든 게 없어 보이고 공부도 이직 준비도 하지 않기에 자기가 먼저 퇴사할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퇴사하고 긴 여행을 할거라는 막연하지만 확실한 다짐이 있었다.

지금 머무는 곳, 치앙마이.

그때 나는 어떤 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행이 내게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여행이 어떤 것인지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길 바랬다. 여행자들이 모두 하는 말. “여행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나를 더 잘 알게 만들어” 어떻게? “여행하는 자는 길 위에서 낭만을 발견할거야.” 그래서, 어떻게 발견하는데? 모두들 여행이 시야를 넓혀주고 나를 성장시킨다고 했지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시야를 넓혀준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행 에세이에 그려지는 낭만적인 수사학을 어렴풋이 이해해보려고 해도 그것은 나의 감상이 아니라 남의 감상일 뿐이었다.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타인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내가 겪지 않으면 평생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 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여행이란 절대로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고, 막연할 수밖에 없다. 여행을 다짐한 사람은 그 막연함에 생의 기대를 얹고 떠난다.


여행을 다짐한 사람은 그 막연함에 생의 기대를 얹고 떠난다.




그리고 이제 여행한지 50일을 넘겼다. 요즘의 나는 잠들기 전에 매일 생각한다. “내가 계속 회사를 다녔으면? 퇴사를 하지 않았으면? 그래서 여행을 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아찔하다. 정말 큰일날 뻔 했다. 정말이지 이걸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책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적어봤다. 여행이 어떻게 나를 더 잘 알게 해주는지, 여행이 어떻게 낭만을 발견하게 해주는지, 여행이 어떤 방식으로 내 시야를 넓혀주는지. 왜 매일 아찔함을 느끼며 잠이 드는가에 대한 나의 매우 주관적인 여행 관찰 보고서.


1. 여행은 과거, 현재, 미래의 나와 닮은 타인을 만나게 해준다. 다시 말해 여행은 ‘나같은 사람’의 수많은 옵션을 보여 준다. 물론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을 가기로 다짐을 하고 어떤 장소를 어떤 방식으로 여행할지 정하는 순간부터 비슷한 사람을 만날 확률은 제곱이 된다. 필터링 같은 것이다. 나는 치앙마이에서 미래의 나와 지금의 나, 과거의 나를 모두 마주친다. 미래의 나를 만나면 그의 삶의 이력과 조언을 듣고, 현재의 나를 만나면 동질감에 하이파이브를 하고, 과거의 나를 만나면 끊임없는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이렇게 수많은 나(같은 사람)를 만나면 나는 지금의 나를 다양한 각도로 마주할 수 있다. 아 나도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 미래엔 저런 옵션도 가능하겠구나. 내가 예전에 딱 저랬구나. 이 곳에서 나는 매일 나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나를 잘 알게 해준다.


2. 여행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킨다. 내가 회사를 다닐 때, 과거를 돌이켜볼 시간은 없었고, 현재는 그저 살기에 급급했고, 미래는 너무 뻔했기 때문에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의 나는 넘치는 시간이 있기에 매일 과거를 반추할 수 있고, 하고싶은 것을 하는 오늘을 살며,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상상하는 재미를 즐긴다. 그리고 어딘가에 머물면서도 항상 다음 장소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느 곳도 정착지가 아니다. 여행자의 시간은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흐르고, 여행자의 공간은 불연속적이지만 언제나 같은 방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낯선 도시에서도 가능하다는 나의 가설은 이렇게 매일 힘을 얻는다. 여행은 나를 더 넓은 시공간으로 데려가준다.


3. 여행은 새로운 시도에 관대할 수 있게 한다. 안해도 되는 것을 굳이 한번 하게 만듦으로써, 여행자를 낭만적으로 만든다. 꿈을 꾸고, 읽고, 시도하고, 글을 쓰기 위한 창의적 성장을 위해 안정적인 어떤 가치를 희생할 수 있다. 머리속으로 생각만 해온 것을 꺼내서 직접 하게 만든다. 작게는 조깅이나 명상, 디지털 디톡스 같은 것에서부터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직업에 대한 상상을 하는 것까지.




여행(의 이유)에 대한 나의 관찰 결과는 이렇다. 그리고 강조하건데, 이 이유는 오로지 나의 이유이다. 내가 여행을 하는 방식, 여행 기간,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취향과 가치관에서 비롯된 여행의 이유다. 그리고 아마 1년 이후에 적는 이유는 오늘 적은 것과 매우 달라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여행은 타인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당신이 여행을 떠나야할 이유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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