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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Sep 24. 2018

당신에겐 갭이어가 필요하다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서울시에서 잠시 일을 멈추고 자신만을 가질 청년 200명을 위한 모집 한다고 한다. “청년 인생 설계 학교”는 서울시 청년의회가 제안한 ‘갭 이어’ 정책의 일환이다. 스펙 쌓기와 구직 활동에 내몰려 자신을 깊이 탐색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할 기회를 얻지 못한 청년들에게 잠시 쉬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자신을 재구성할 시간을 제공한다고 한다. 그간 정부와 지자체의 청년 복지는 일자리 창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회사에서 퇴사한 사람들의 제2의 방황은 끈기 없는 개인의 문제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들의 잦은 퇴사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 인생설계 학교는” 단순히 취업이 아니라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늦게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학교다.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청년 인생 설계 학교"


나 역시 현재 갭 이어를 빙자한 긴 여행 중이다. 졸업하자마자 직무에 대한 고민도 없이 무작정 입사한 대기업에서 적응하지 못해 3년을 채우고 퇴사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 퇴사하기까지의 고민들을 담아 <공채형 인간>이라는 독립출판물을 내기도 했다. 얼핏 공채 시즌 합격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으로 오독될까 봐 급하게 부제를 추가했다. “결국 퇴사할 수밖에 없는 공채형 인간.”

자기소개서 합격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랍니다...


지금의 공채 제도는 60년대부터 이어진 한국(그리고 일본)만의 독특한 유산이다.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에 따르면 공채는 고도 성장기 한국 기업에 딱 맞는 인재 선발 방식이었다. 일할 사람이 많이 필요한 산업화 시기, 짧은 시간 동안 대규모 인원을 채용할 수 있는 공채 제도는 기업에게 유리한 전략이었다. 우선 뽑고, 인사에서 알아서 사람을 직무로 보내면 됐다. 이때 구직자들에겐 대단한 전문성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채는 ‘공정한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 공개 채용이 공정한 채용 방식이라는 말에 우리는 더 이상 공감하지 않는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채용비리와 낙하산 뉴스를 우리는 매일같이 접한다. 그럼 공채는 효과적 이기라도 하나? 사회는 기술적으로 더 고도화됐고 일자리는 적다. 이제 직무에 대한 비전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각광받는 시대다. 대부분의 기업들 역시 제너럴리스트를 뽑는 공개 채용에서 직무 중심의 상시 채용으로 넘어가고 있다. 얼마 전 공채의 원조 국가 일본의 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은 기업들 사이에서 채용 질서를 위해 채용 일정과 면접, 기업설명회 기간 규칙을 정한 ‘취업활동규칙’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일본 역시 앞으로 상시 채용의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다.


상시 채용할 때는 이렇게 옷 안 입어도 되죠..?


상시 채용의 사회에서는 기업은 일 년 내내 채용을 하고, 면접 일정과 설명회도 구직자 중심으로 재편된다. 적당히 인성 좋은 사람을 뽑아서 직무를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티오가 있는 직무에 가자아 잘 맞는 우수인재를 뽑아 OJT 중심으로 업무를 배우게 될 것이다. 물론 1년 내내 취업을 해야 하는 무한 경쟁의 시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시 채용의 시기야 말로 갭이어를 갖기 적절한 때다. 휘몰아치는 공채 시즌에는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자기소개서부터 쓰고 나를 끼워 맞춘다. 상시 채용은 이제 그런 사람은 뽑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제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업에 억지로 맞춰 쓰는 자소서 카피본의 아니라, 나와 맞는 직무를 찾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갭이어’를 권장한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은 내가 가는 길에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길의 끝에서 알게 될 때다. 1년의 갭이어를 생각하고 퇴사한 지 두 달, 여행한 지 이제 한 달이다. 맘껏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작정한 이번 여행길, 쉴 틈 없이 샘솟는 아이디어와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나만의 시간 안에서 나는 작은 시도를 반복하고 자신감을 얻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아온 한 달의 시간 동안,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도전할 자신감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은 내가 가는 길에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길의 끝에서 알게 될 때다.



물론 갭이어를 위한 어느 정도의 준비는 필요하다. 나는 여행을 오기 전, 퇴사 학교에서 <지식창업 시뮬레이션>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퇴사 후 갭이어를 조금 더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떠나기 위함이었다.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꿈꾸는 ‘작가’, ‘유투버’, ‘크리에이터’. 이것이 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밖에 나가서 영상을 찍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 업로드하면 된다. 


퇴사 후 갭이어가 걱정되는 사람들에겐, 다양한 사이드 잡을 추천 한다. 지난 14일 열린 ‘평생직장 개뿔, 개인의 시대’ 콘퍼런스에는 회사가 아닌 딴짓을 통해 개인의 시대를 개척하는 9명의 연사가 나왔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고, 자신감을 받을 수 있다면 굳이 퇴사라는 큰 선택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지금 자기 자신에 대한 관대함과 자신감이 굉장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관대해질 시간을 허하라. 적어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닌가?




저는 지금 치앙마이의 한 카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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