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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전환점을 지나다

나의 삼십대를 그리다

by 사과집

Day89 / Pai, Thailand / 11.17


지적인 자극을 받는 나날
여행을 한 이후, 지적인 자극을 가장 많이 받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장애와 정체성 사이의 정치학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앤드류 솔로몬 <부모와 다른 아이들>과 가사노동의 불평등을 신선하고 체계적으로 호소하는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이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은 지금 석 달째 읽는 중이다. 총 2권, 주석 포함 약 1600페이지…) 좋은 텍스트를 읽으면 나도 빨리 뭔가를 쓰고 싶어진다.


여행을 하면서 읽은 책들은 작년과 확실히 차이가 난다. 작년에 읽은 책들의 주제가 넓고 산발적이었다면, 지금 내가 읽는 책들은 관심있는 몇가지 주제로 좀 더 좁혀진다. 요즘 관심사는 딱 세개로 요악할 수 있다. 여성주의, 장애와 몸, 탈식민주의. 엄밀히 말해서 다 같은 주제다. 여성주의, 즉 탈식민주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메타젠더의 시각으로 제도권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주변과 중심을 해체하는 법.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조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


예민함을 자원으로 삼기
여행을 하면서 또 하나 느끼는 점은 다양한 방식으로 빡치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오로지 회사 때문에 빡쳤다면, 이젠 회사를 제외한 모든 것이 나를 빡치게 한다. 가족들, 친구들,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 온라인, SNS, 기사..등등.. 나를 빡치게 하는 수많은 현실과 말, 주장과 부딪힌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 빡침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좀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민함을 자원으로 삼는 방식에 대하여.

미생물학자 서민 교수는 빡치는게 있을 때마다 댓글로 캡쳐한다고 하는데(주로 엠팍에서 여성혐오 글을 캡쳐한다고...), 요즘의 나의 취미 중의 하나도 이상한 댓글들을 캡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정희진 선생님이 모든 발화 행위는 협상적 말하기라고 했던가.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공부하고 쓰고 불합리함을 설득하고 싶다는 자극을 받는다. 고통은 자원이다. 그리고 자주 예민하고 자주 화가나는 것은 나의 장점이다. 나의 자원을 활용하여 발화하는 법, 체제 안의 언어를 공부하면서 나의 언어도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는 요즘.


아이작 뉴턴의 유명한 말,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이 이야기도 뉴턴이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여성주의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뉴턴의 말을 약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가 아니라 ‘발’ 아래서 세계를 처음 접한다, 사회적 약자는 이미 출발선이 다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출발선이 위로가 된다. ‘우리는’ 어깨 위에서 시작한 이들보다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더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 정희진의 낯선 사이


나의 삼십대를 그려보다

항상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 직업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글쓰기, 소통을 위한 글쓰기, 설득을 하기 위한 글쓰기. 돌이켜보면 이십대의 나의 글쓰기는 모두 자기 표현의 글쓰기였다. 절반은 내 이야기, 절반은 남의 이야기를 빗댄 나의 이야기였다.

삼십대엔 남의 이야기를 더 많이했으면 좋겠다. 정확히 말해 우리의 이야기, 우리 모두가 더 나아질 수 있는 이야기를 했으면. 내게만 집중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그때는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더 많은 사람을 위로하기를. 쓰고 읽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편해지기를,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하는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읽고 쓰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기를. 실험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인생은 사후해석이니까, 삶에 너무 맥락을 부여하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삶의 흔적에 대한 공통점은 없더라도, 항상 같은 가치관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누군가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아티스트보다는 액티비스트가 더 되고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조지오웰이 말했듯이,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싶다. 그런 삶은 평생을 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한지 석달이 지난 지금 인생의 전환점을 지나간다고 느낀다. 처음으로 나의 서른 너머에 대한 설레는 청사진을 그려나가는 시간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있을까 너무 기대되서 잠까지 설치는.... 구체적인 삶의 방향은 계속 바뀌겠지만, 공부하고 글을 쓰는 것은 평생 이어질 삶의 숙제가 될 것이다. 적어도 내게 쪽팔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그게 지금 나의 최소한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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