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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100일 차에 쓰는 2018년 결산

뭐가 달라졌는지 물으신다면

by 사과집

결산충


방금 만든 나의 별명이다. 나는 정리 강박이 있어서 여행이 특정 일수를 채울 때마다 결산을 내는 글을 쓰고 있는데, (10일 결산, 한 달 결산, 40일 결산, 50일 결산, 90일(석 달) 결산…. 나와의 기념일에 미친 사람…) 오늘은 가장 결산을 내기 좋은, 여행한 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미얀마에서 한 달, 태국에서 두 달이 벌써 훌쩍 지났다. 게다가 연말 시즌이라 2018년을 갈무리하기도 적절한 때라, 치앙마이의 모기가 많은 카페에 앉아 올해의 이른 결산을 써본다.


2018년, 올해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스무 살 상경한 이후 가장 많은 변화가 있던 해가 아닌가 싶다.


우선 퇴사를 했다

2015년 여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직무에 대한 고민도 없이 아무 일이나 열심히 하겠다며 무턱대고 들어갔고, 얼떨결에 HRD(기업교육) 직무를 맞아 회사의 연수원을 전전하며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딱 만 3년을 채우는 올해 7월,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한 이유는 뭐, 다른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이 직무를/이 곳에서/평생 할 자신이 없다." 평균 연령 100세 시대에 내게 더 잘 맞는 일이 잊지 않겠나!라는 안일한 자신감으로 회사를 때려치웠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일일랑은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시도해보고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 덕에 드로잉 수업도 듣고, 우쿨렐레도 처음으로 배웠다. 휘민이 덕분에 퀴어축제 공연에서 키보드도 쳤다. (내 인생에 서울 광장에서 공연할 일이 다시 있을지,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요 몇 년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했다. 그건 바로,


책을 만들었다.

약 5년간 글을 써온 것들을 갈무리해서 독립출판물 <공채형 인간>을 냈다. 대학생 시절, 취준 시절, 직장 시절, 그리고 퇴사하기까지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써왔던 글들을 정리한 책이다. 나는 딱 나 같은 청년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사회에 나를 맞춰보려고 애써본 경험이 있는 사람, 그리고 결국 다른 선택지를 고민하는 사람"을 위한 책.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예상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싶었던 나의 지난 5년의 기록을 한 권에 책에 담기 위해 애썼다. 독립출판은 기획, 디자인, 입고, 홍보, 유통까지 모두 스스로 한다. 그래서 퇴사하고 약 한 달간은 스타벅스에 처박혀 책을 만들고, 서울에 있는 서점을 돌아다니며 내 책을 부지런히 팔고 다녔다. 그 덕에 나와 비슷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할 수 있었고, 현재는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의를 받아 개정판을 준비 중이다. 첫 1쇄의 300권을 간신히 모두 팔고 난 후에는,


집을 빼고 여행을 왔다.

스무 살 상경한 이후, 8년간의 서울 생활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짐을 정리하고 오피스텔도 뺐다. 해외 체류 신고도 했다. 현재 내 주소지는 '진관동 주민센터'다. 그리고 캐리어 하나에 삶의 모든 것을 담아 낯선 도시로 긴 여행을 떠나왔다.


여행의 첫 번째 도시는 조지 오웰이 글을 쓴 미얀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잭 케루악처럼 여행하고, 버지니아 울프처럼 글을 쓰며 낯선 이름의 도시들이 모두 나의 방이 되는 여행. 상상 속의 그 방은 아늑하지만 낯설고, 불연속적이지만 영구적이고, 조용하지만 항상 선율이 끊이지 않았다. 예상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나를 알아보는 나날을 꿈꾸며 떠나온 지, 오늘로 딱 100일이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는지 물으신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는 삶을 꿈꾼다

퇴사하고 번 돈을 야금야금 쓰고 있는 지금, 매일같이 먹고사니즘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지에 대해서. 그래도 퇴사를 하고, 책을 만들고, 여행을 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내가 느낀 점 하나는 "꼬박꼬박 월급 받지 않아도" 어떻게 '살아갈 수는' 있다는 거였다. 직업의 다양한 방식 - N잡, 사이드잡, 프리랜서, 디지털 노마드에 대해 상상한다. 특히 나의 콘텐츠로 비용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 내가 하는 일이 나의 가치관과 부딪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시간이 많다 보니 각종 딴짓에 관심이 많아졌다. 앞으로는 너무 많은 기술이 생겼다 사라질 거고, 우리는 오래 살 거다. 그러니 각종 딴짓을 알아두는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런 딴짓 중에서도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역시 글을 쓰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공부하는 시간

항상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 직업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글쓰기, 소통을 위한 글쓰기, 설득을 하기 위한 글쓰기. 그런데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공부해야 함을 여실히 느낀다. 여행은 매일같이 나의 무지를 일깨워준다. 매일같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와 우리에 대한 공부. 내가 모르는 타인의 삶에 대한 공부.


돌이켜보면 이십 대의 나의 글쓰기는 모두 자기표현의 글쓰기였다. 절반은 내 이야기, 절반은 남의 이야기를 빗댄 나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 나보다 남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 요즘 가장 공부하고 관심 있는 주제는 딱 세 개로 요악할 수 있다. 여성주의, 장애와 몸, 탈식민주의. 엄밀히 말해서 다 같은 주제다. 여성주의, 즉 탈식민주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메타 젠더의 시각으로 제도권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주변과 중심을 해체하는 법.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조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곧 스물아홉이 되고, 서른이 되다는 게 가끔 조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서른이 되기 싫다는 조급함은 아니다. 더 괜찮은 삼십 대가 되고 싶다는 조급함이다.




열아홉에 했던 다짐처럼


2009년 열아홉 살의 내가 정치학과를 지원하며 썼던 자기소개서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여성과 장애인, 우리 주변의 소수자를 위해 세상을 바꾸는 삶을 살고 싶다고 적었다. 그리고 십 년을 돌고 돌아, 이제야 그 이슈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할 다짐을 한다. 한때는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다. 그저 얘기하면 된다는 걸.


열아홉의 다짐을 되새기며 스물아홉의 다짐을 다시 쓴다. 스물아홉엔 남의 이야기를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정확히 말해 우리의 이야기, 우리 모두가 더 나아질 수 있는 이야기를 했으면.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더 많은 사람을 위로하기를. 쓰고 읽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편해지기를,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읽고 쓰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기를. 실험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인생은 사후 해석이니까, 삶에 너무 맥락을 부여하려고 애쓰지 않기를. 삶의 흔적에 대한 공통점은 없더라도, 항상 같은 가치관을 올곧게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그런 의미에서, 여행한 지 100일이 지난 지금 나는 인생의 전환점을 지나간다고 느낀다. 처음으로 나의 서른 너머에 대한 설레는 청사진을 그려나가는 시간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내가 어떤 사람이 돼있을까 너무 기대돼서 잠까지 설치는.... 구체적인 삶의 방향은 계속 바뀌겠지만, 공부하고 글을 쓰고 행동하는 것은 평생 이어질 삶의 숙제가 될 것이다. 적어도 내게 쪽팔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그게 지금 나의 최소한의 목표다.



나의 28살, 2018년 결산 :

나의 무지와 가능성을 같이 깨달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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