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
여행 90일차에 접어들었다. 여행을 하며 종종 한국인들을 만나면, 먼저 학생인지/직장인인지 묻고, 서로 나이를 물어보고, 동갑이면 말을 놓는다. 내가 나이가 어린 경우엔 "편하게 말 놓으세요~^^"라고 먼저 반말을 제안하고, 내가 나이가 더 많은 경우에는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친밀한 한국식 호칭을 정한다. 이렇게 몇번 얘기를 하다가 누구 한명이라도 먼저 말을 놓게 되면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빠르게 친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행에서 만난 사람과 빠르게 친해지고 싶지 않다.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나는 평생 만난 모든 사람을 일정한 시간과 복잡한 사건 속에서 관계를 차근차근 쌓아왔는데, 여행이라고 해서 처음 만난 사람이랑 굳이 급속도로 친해질 필요가 있을까? <적당한 거리감을 가진 낯선 여행자>라는 여행자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즐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천천히 대화를 하다가, 나와 잘 맞는 사람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게 일반적인 관계의 패턴이 아닌가!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여행지의 첫만남에 나이부터 확인하는 것은 서로 친해져가는 여러 단계를 건너뛴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위계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대화 방식을 정해보자"라는 암묵적 합의라고 느껴진달까. (물론 이건 여행지에서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특히 나는 동갑의 경우에만 빠르게 친해진다는 것이 불편하다. 내가 더 알아가고 싶은 사람은 나이와는 상관 없는데, 꼭 유독 동갑인 사람들만 내게 친구라는 이유로 거리감을 좁혀온다. 왜 동갑인 경우에만 갑자기 친구가 되는거죠?! 한편 동갑이 아닌 사람과 대화할때는 걱정이 된다. 첫 만남부터 나보다 나이 많다고 말을 놓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오래 봐도 나와는 안맞겠다"는 생각이 들고, 반대로 나보다 어린 사람을 보면 내가 꼰대짓을 하지 않을지 걱정된다. 이렇게 언어의 수직적 편차, 즉 한사람만 말을 놓는 관계는 일방적인 권력이 작용하기 쉽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저는 친한 사람한테도 존댓말을 써요. 말 놓기를 어려워 해서...
먼저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줄리언 반스의 소설 <연애의 기억>의 주인공은 19살 남성과 40살 여성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깊게 보았던 건 연상녀/연하남의 대화가 어떤 식으로 번역되는가였다. 처음엔 둘다 존댓말을 쓴다. 그러다가 나중엔 여자는 반말, 남자는 존댓말을 쓰고, 나중엔 둘다 반말을 한다. 원래 영어에 없는 존댓말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미묘한 늬앙스를 살린 번역의 아름다움을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줄리언 반스의 소설은 번역가가 바뀌고 읽기가 훨씬 좋아졌다...), 어쩌면 이런 존댓말 때문에 원문의 늬앙스를 왜곡해서 읽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되기도 했다. 원작자가 보여주려던 미묘한 관계의 다이나믹스가 존댓말/반말을 사용하면서 일반화된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한편 만약 40대 남성과 19세 여성의 만남이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처음부터 남자는 반말로 시작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도 했다.
존댓말/반말의 문화에서는 동갑을 제외한 모든 관계가 수직적이다. 최근 장강명 작가가 출연한 한 동영상에서 장 작가는 반말은 쉽게 욕설이 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개인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모멸감을 안긴다고 하면서 "한쪽은 반말, 한쪽은 존댓말을 쓰는 상황을 몰아내자"고 주장했다. 반말은 욕설로 이어지기 쉽고, 혐오 표현으로 이어지기도 쉽다. 이렇게 언어는 권력 관계가 담기길 마련이다. 만약 당신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꼰대가 되지 말아야지"라는 추상적인 다짐보다, "처음 본 사람에게 반말하지 말자", "서로 동등한 언어 표현을 사용하자"와 같은 구체적 언어 가이드라인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낯선 이를 만날 수 있는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격차가 더욱 불편하다. 그리고 그 언어의 격차에 알게 모르게 익숙해질 내가 두려워서 끊임없이 나를 검열한다.
그러니까 우리 한쪽만 반말하지 않기로 해요. 말 놓을거면 둘다 놓고, 아니면 둘다 존대하자구요.
첫 만남부터 급속도로 친해질 필요는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