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시간 없어요
마땅히 미안해야할 일 말고, 예의를 차리느라 뱉어왔던 미안함에서 졸업할 때가 왔다.
얼마 전 직장 내 여성으로서 성차별을 받은 경험을 인스타그램 응답하기로 물어본 적이 있다. 최근 가장 관심있는 주제라 사례를 모아보고 글을 쓸 요량이었다. 그렇게 내가 받은 사례들을 살펴봤다. 몇개는 공감이 갔고, 몇개는 나의 짧은 직장생활으로는 공감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친밀한 사람들의 경험담이라는 것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난감했던 것은 어떤 남자 분이 보내 준 응답이었다.
“남자가 받는 성차별. 바지 헐렁한거 입고갔더니 엉덩이 안보인다고 꽉끼는거 입고 오라는
30대 여자 과장들”
이 응답을 보고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남자분의 응답에서 <남자도 못지않게 차별당한다!>라는 피해의식과 반발감이 느껴졌다. 나는 "직장 내에서 여성이기에 받은 모든 차별 - 즉 외모 평가, 가정과 결혼/육아로 인한 차별 대우, 유리천장, 술자리에서의 성희롱,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조롱, 여성들에게만 강요되는 외모 치장 등에 대해 알려달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사례>를 내게 보내준 그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분의 피드에서 꽤나 여성혐오적인 글을 봐왔기 때문에, 더 화가났다.
나는 그 응답에 답변하는 것은 잠시 미뤄두고 샤워를 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바로 응답하면 감정이 섞일 것 같았다. 어떻게 답장을 해야할까? "본인의 경험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드셨겠군요?"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감사하지도 않고 미안하지도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꺼낸 그 사람의 무지에 빡칠 뿐이었다. 자신의 차별 경험을 공유해준 여성분들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생각은 더 더욱 없었다. 그 대신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전달하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여성이 직장으로서 받는 성차별에 대해 질문했는데 이런 답변을 주시는 것은 아마도 남자도 이렇게 차별받는다, 라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이해 되는데요. 그런 외모 지적과 평가, 성희롱, 꾸밈 노동에 대한 강요는 여성들에게 더 만연한 것이 사회적인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여성’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자 질문 드린거구요.”
아닌 건 아니라고, 나의 생각을 말한 것 만으로도 후련해졌다. 함부로 미안해하거나 감사해하는 것은 내 의미 전달을 방해할 뿐이다.“유감이네요” 혹은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미사여구 없이, <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게 때로는 더 중요하다.
나는 멍청한 말에 미안할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에서 한채윤씨는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조언한다.
의견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의가 상할 때까지 싸우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거나, 의가 상할까봐 내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죠.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권해드리는 것은 의가 상하지 않기 위해 침묵은 하더라도 마지막 한 마디는 하자는 거죠. “나는 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