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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Nov 27. 2018

칼럼에 관한 칼럼

왜 칼럼에는 항상 증명사진이 있나요?

매일 네이버 뉴스 오피니언 탭에서 오늘의 칼럼들을 읽는다. 가끔 어떤 칼럼을 보면 화가 난다. 예컨대 요즘 처음 들은 단어라며 ‘소확행’과 ‘YOLO’를 설명하고 있는 칼럼을 볼 때가 그렇다. 2018년이 다 끝나갈 무렵 소확행을 처음 들어본다니, 신문에 정기적으로 글을 연재하는 직업 칼럼니스트 치고는 트렌드에 너무 무지한 것이 아닌지? 김난도의 <트렌드 코리아 2019> 라도 읽으라고 쥐어주고 싶다. 하지만 트렌드에 무지한 것보다 어이없는 건 시대에 뒤쳐진 사고를 당연한 말인냥 할 때다. "어느 화려했던 골드미스의 최후"라던가, “저출산 시대, 아이들은 축복이다” 같은 글들을 볼 때...  과감하게 일반화를 하자면 보통 이런 글들의 열에 아홉은 글 앞머리에 중년 남성들의 당당한 증명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갑자기 칼럼에 증명 사진을 넣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왜 굳이 칼럼니스트의 얼굴을 보여주는걸까? 진짜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얼굴만 보고 사람들이 칼럼니스트를 알아보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얼굴에서 드러나는 기본 신상 때문에 (나처럼) 편견을 가지고 글을 읽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얼굴의 전시는 익명 악플러에게 혐오표현의 대상이 되기도 싶다. 지긋한 연세의 남성으로 보이는 논설위원에게 “나이를 드시고 연금 받아 사시니 현실을 모르시나본데요”, 여성 칼럼니스트의 글에 “메갈이 어디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는 댓글처럼 말이다. 모두 얼굴이 보이기 때문에 달 수 있는 댓글이다. 


칼럼니스트의 얼굴을 보여주는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칼럼을 읽는 입장에선 나는 사진을 ‘글을 거르는 용도’로 사용한다. 등장한지 이미 한참 지난 트렌드(feat. 소확행)를 제자를 통해 지금에야 접한 사람, 흔하고 당연한 말을 사자성어와 현학적인 말을 사용해 굳이 번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기득권인 중년 남성들이다. (당연히 참신하고 지성이 넘치는 글을 쓰는 중년 남성들도 많다.) 그래서 나는 386세대 남성들의 사진으로 가득찬 칼럼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몽타주의 글들을 주로 클릭한다. 여성이거나, 청년 세대거나, 혹은 외국인이거나. 내가 칼럼을 읽는 이유는 내가 모르는 다양한 시각과 사유를 접하고 싶어서지, 당연한 말을 현학적으로 풀어놓은 글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글은 지면 낭비요, 데이터 낭비요, 그걸 읽는 내 시간 낭비다. 


어쨌든 이 칼럼니스트 얼굴에 대한 기나긴 잡설은 좋은 칼럼을 읽고 싶다는 독자의 순수한 욕망에서 출발한다. 좋은 칼럼은 단 한편이어도 그것을 읽기 전후의 나를 바꾼다. 요즘 칼럼니스트 중에서 가장 핫한 김영민 교수님이 최근에 쓰신 칼럼에 대한 칼럼을 살펴보자. 기고된 신문사의 의견을 강화하기에 그치는 "정략적 로비로 쓰는 글", "아무 생각없이 무의식의 흐름으로 쓰는 글", "비문으로 가득찬 글"은 나쁜 칼럼이다. 그럼 좋은 칼럼이란? "편하고 상상할 수 있는 내용만 쓰는 것보다는 칼럼을 읽고 독자가 조금이라도 변하기 바라는 칼럼은 상상밖의 내용이라도, 내용이 거슬리더라도, 글을 읽어나가는 글"이고 "맹목적 정보 전달 이상의 내러티브를 갖는 글"이다. (그래서 좋은 칼럼의 댓글란엔 보통 발작버튼이 눌린 악플들도 많다. 악플이 많아야 좋은 칼럼이란건 아니구요.)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


칼럼이란 정치적 글쓰기다.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네가지 동기 중 하나로 정치적 동기를 말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그러나 좋은 칼럼은 동시에 미학적이어야 한다. 당파적이지만 개인적인 경험과 개별성이 담긴 글, 당연한 전제를 뒤집는 낯선 시선을 가진 글이야말로 내가 읽고싶은 글이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나 역시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 장식적인 형용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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