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빈에서 내렸나 | 비포 선라이즈

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by 오성범

"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모든 영화에 장소적 배경이 있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장소를 활용하는 방식이나 비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경주>, <문경>, <밀양>, <강원도의 힘>처럼 제목 자체가 특정 지명인 영화가 있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 왜 그곳이지? 라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면 <멋진 하루>같은 영화는 제목은 물론 내용에서도 특정 장소를 부각시키지 않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2000년대 서울 풍경을 잘 담아냈다는 생각이 들고요.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두 주인공은 기차에서 만납니다. 셀린(배우: 줄리 델피)은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제시(배우: 에단 호크)는 빈으로 가는 길이었죠. 기차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아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빈에서 함께 내려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하루를 같이 보냅니다. 영화에는 빈 중앙역을 비롯해 슈테판 대성당, 호프부르크 궁전, 프라우엔 교회, 도나우 강변까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의문이 남습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 중에서 왜 빈이었을까요? 그저 빈이 아름다운 도시라는 이유 말고 좀 더 영화적인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추측이지만, 우선 빈은 두 사람의 목적지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공간입니다. 서울을 예로 들면, 여러 노선으로 환승이 가능한 서울역, 신도림, 사당 같은 곳인 거죠. 처음 본 사람인데, 돌아가거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보다 자연스럽고 현실적이니까요. 제시는 마드리드를 거쳐 유럽을 여행하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빈으로 가는 중이었고, 셀린은 부다페스트에서 빈을 거쳐 파리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빈이 파리로 가는 길목에 있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거나 만났어도 빈으로 향하기는 어려웠겠죠.


빈 국제공항은 규모나 이용객 수에서 파리 샤를드골 공항이나 런던 히드로 공항에 비해 한참 못미치지만, 대륙 내 이동수단인 철도에서는 빈 중앙역이 유럽 내 10위 안에 들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도 내릴 가능성도 높은 곳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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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내린 다음의 일입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짧은 시간동안 서로를 알아가야 할 때, 직설적인 질문 대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기에는 음악이나 미술만한 것이 없으니까요. 오스트리아 빈은 모두아시는 것처럼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부터 클림트, 실레까지 예술가의 도시입니다. 단순히 거장을 배출한 도시라는 상징성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예술과 관련된 교육, 공연, 관광 인프라로 가득합니다. 인구 200만의 작은 도시에 대규모 공연장이 7개나 있다는 사실만 봐도, 빈에서 얼마나 많은 공연이 열리고 빈을 찾는 관람객들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두 주인공 역시 빈에서 레코드숍, 전시회, 클럽, 카페를 돌아다니며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제가 두 주인공과 같은 대학생 시절에는 종로나 대학로가 그런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내 중심에 있어서 어디에서든 가까웠고 지하철과 버스 노선도 많으니 자연스럽게 약속장소가 되었죠. 지금과 달리 영화관, 소극장, 서점, 카페도 모두 그곳에 밀집해 있었으니 소개팅이라도 한다면 종로나 대학로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피맛골(종로 뒷골목)에서 술 한잔 하고 인사동 골목을 지나 대학로까지 걸어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연애는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누구를 만나게 될지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모두 각자의 시공간을 가지고 살아가는 만큼, 서로 만나게 되려면 한번쯤은 시공간이 겹쳐야 하니까요. 만날 만한 곳에서 만나고, 얘기를 나눌 만한 곳에서 얘기를 나눠야 서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비포 선라이즈> | Before Sunrise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1996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

알 수 없는 감정에 끌린 두 사람은 아무런 일정도 없이 기차에서 하차한다. 그리고 단 하루, 꿈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왜 사람들은 관계가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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