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허접한 엔딩 - 붉은 빛 뿔테를 쓴 그녀

by 이재근

오늘처럼 재판이 있는 날 비가 내리면,

두손으로 휠체어를 밀어야 하는 나는 우산을 쓸 수가 없다.


이제는 비 맞는 것에 익숙하고, 별 거리낌도 없지만,

그런 나라도 오늘처럼 우박까지 떨어지는 날에는 차마 차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있다.


우박이 멎을때까지 잠시 차안에서 대기하는 동안

슬프도록 허접한 이야기 하나.


그녀와 나는 계절학기 수업에서 만났다.


교수님은 100명이 넘는 수강생들을 한명한명 앞으로 불러내서 자기 소개를 시켰는데,

쭈뼜대거나, 기껏해야 어느과 몇살 누구 정도의 지루한 자기소개가 지겨워질 즈음,

선명하게 들리는 한마디.


'저는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붉은 빛이 도는 약간 진한 뿔테를 쓴 것 말고는,

끼라고는 하나도 없어보이는 핏기 없는 얼굴의 영문과 여학생이

담담하게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부르는 그 장면은 그야말로 신선했다.


그후로 그녀와 여러번 차를 같이 마셨다.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들켰을때 그녀가 말했다.


'이건 반칙이에요'


그렇게 그녀와는 끝이 났다.


...


대학이든 회사든 CC의 문제점은

헤어진 이후에도 얼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캠퍼스는 꽤 넓어서,

경영학과와 영문과로 서로 전공이 달랐던 우리가

우연히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 비가 내리던 날까지는.


그 날은 비가 많이 왔다.

여느 날처럼 이 정도 비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도서관쪽으로 휠체어를 밀던 내 두 눈에 그녀 모습이 들어온다.


이쪽 보지 마라.

제발 나를 알아보지 마라.


하고 주문을 외워보았자,

이미 저만치부터 나를 알아본 그녀가 뛰어온다.


그녀가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아마 혼자 비를 맞고 있는 나를 그냥 지나칠수 없었을테다.


'도서관까지 같이 가요'

'아니, 저 혼자 갈 수...'


라고 해봤자 이미 그녀가 우산을 받쳐든 후다.


도서관까지 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이동하는 내내 머리 속에는 한가지 생각밖에 없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떻지?'


시험기간이라 이발이고, 면도고 제대로 안 했고,

옷매무새야 뭐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로션은 발랐던가?


하필 그런 날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며 걸었는지,

마지막 인사는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 나지 않는다.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는 걸 확인하자 마자,

는 힘을 다해서 거울이 있는 화장실로 휠체어를 민다.

내가 얼마나 초라한 모습일까?


'어머!!!!'


마주친 여학생 비명에 여자 화장실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미 비에 젖어서일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생각만큼 초라하지는 않았던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슬프도록 허접한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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