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디든 갈 수 있도록
14살에 그야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척수에 생긴 혹 때문에 휠체어를 타게 되어 반년 만에 다시 돌아간 학교는 온통 갈 수 없는 곳 투성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학교는 나의 교실을 어디로 정할지 논의했다. 당시는 연합고사 성적에 따라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비평준화 입시가 치러지던 시절이라 학교는 3학년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 조성에 공을 들였는데, 조용한 학습 환경을 위해서 3학년 교실은 학생들의 왕래와 소음이 적은 3층으로 배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문제는 휠체어를 타는 3학년 이재근 학생이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학교에 없는 상황에서, 이재근 학생이 속한 학급만 1층으로 배정할 것인가였다.
장시간 회의 끝에 나온 학교의 입장은 ‘안타깝지만 학생 한 명을 위해서 3학년 나머지 학생이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부모님도 별다른 이의를 하지는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와 같은 생각이 당연했고, 1층 배정은 권리가 아닌 특혜를 바라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은 학급 친구들 중 네 명을 지원받아 ‘이재근 나르기 특공대’를 결성해주셨고, 친구들은 매일 등교와 하교 때에 맞춰 1층부터 3층까지, 3층에서 1층까지 나를 들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렸다. 졸업식 날 어머니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으셨고, 1년 동안 3층까지 나를 들어주었던 고마운 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도 남겼다. 당시엔 그것이 자랑이었고, 미담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어머니가 매일 내 등교를 시켜줄 수 없었다면, 담임선생님이 이재근 들기 특공대를 만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친구들이 나를 기꺼이 들어 옮겨주지 않았다면, 그 수백, 수천 번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중에 누구라도 실수로 계단에서 휠체어를 놓쳤다면, 이 모든 행운 중 한 가지라도 부족했다면 과연 내가 무사히 학교를 마칠 수 있었을까? 참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호의, 겹겹이 겹쳐진 우연의 기반 위에 지금의 내가 두 휠체어 바퀴를 딛고 있다.
그러나 셀 수 없는 희생과 호의, 행운들이 겹치지 않더라도,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접근성은 그리고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편의시설은 그 출발점이자 전제조건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접근성을 제한당하는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평범한 일상조차 힘겹다. 학교에 다니고, 수업을 듣고,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교육과 근로의 기본적 장면부터,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수다를 떨고, 전시와 공연과 스포츠경기를 관람하는, 그렇게 나와 당신이 평범한 일상에서 어울리는 모든 일은 우선 두 바퀴로 그곳에 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세월이 흘러 집 앞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경사로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반짝반짝한 새 건물이 지어질 30년, 50년 후까지 그 평범한 일상을 유보하여서는 안 된다. 그 평범한 일상을 당신은 잠시 유보하여 두고, 다음 세대가 혹은 그다음 세대가 그 이상을 누리도록 하자고 양보해서도 안 된다. 그 평범한 일상은 천천히 누리기로 하고, 당장은 누군가의 호의와 희생, 그리고 행운에 맡겨보자고 운에 기대서도 안 된다. 어쩌면 아무런 이유없이 불쑥 찾아오는 걷지 못한다는 불운이, 그렇게 ‘불운한 일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1층이 있는 삶’을 앞당겨 나가기 위한 노력들이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기고한 칼럼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