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기계식 키보드가 생겼다. 남편은 몇 년 전부터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했는데 딸각거리는 소리가 친숙한 내게는 꽤 좋아보였다. 평소 컴퓨터 사용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이고 내 것까지 사기엔 좀 무리한 가격대였기에 욕심내지 않았다.
며칠 전 갑자기 남편이 아직까지 기계식 키보드 갖고 싶으면 마침 행사를 하니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알록달록한 LED불빛 때문에 눈 아플것같다고 거절하다 마지 못한 척 눈부시게 새하얀 키보드를 골랐다.
10년 넘게 사용했던 낡고 칙칙한 회색키보드 대신 하얀 키보드가 생기니 뭔가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느낌일까 몇번 두드려보니 어라? 생각했던 것보다 소리가 더 요란했다. 옆에 누군가 있다면 틀림없이 시끄럽다고 한 소리 할 정도다.
청축이라고 했던가...키보드 내부 작동축의 방식에 따라 청축, 갈축, 적축, 흑축으로 나뉘는데 종류에 따라 소음이나 두드리는 느낌의 차이가 크다고 한다. 나는 남편 키보드 정도로 소리가 나는 건 괜찮을것 같다라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내 말을 곡해들었는지 자기 것은 갈축인데 내 것은 청축 키보드로 골랐다. 알고 보니 청축 키보드는 기계식 중에서도 가장 소리가 크고, 남편이 사용 중인 갈축 키보드는 그것보다 훨씬 소리가 조용한 것이다.
새로 산 기계식 키보드는 소리만 요란한 것이 아니다. 컴퓨터 전원을 켜면 구석구석 피가 돌듯 LED 불빛이 키보드 전체를 빠르게 두번 휘감아돈다. 현란한 불빛이 빛의 속도로 키보드를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면 비로소 완전히 알록달록한 불빛이 키 하나하나에 빠짐없이 켜진다. ESC 버튼과 F1버튼이 있는 맨 윗쪽은 파랑 불빛, 숫자키가 있는 두번째 줄은 초록, 알파벳 Q 로 시작하는 세번째 줄은 보라색, 알파벳 A 로 시작하는 넷째줄은 주황색, Z가 있는 줄은 빨강, 스페이스키가 있는 마지막 줄은 하얀빛이다. 처음에는 너무 눈이 아플것 같아 보여 불빛을 꺼둔채로 사용해야지 했는데 익숙해지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이제는 전원을 켤 때마다 빛나는 LED불빛이 반기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핀셋이나 도구가 있어야 키를 분해 할수 있는 멤브레인 키보드와 달리 마음만 먹으면 키를 하나 하나 쉽게 분리할수 있다는 점도 신기하다. 손가락에 살짝 힘을 줘서 잡아 당기면 쑥하고 버튼 하나가 빠진다. 키가 높고 틈이 많아 먼지가 더 쉽게 끼는 단점도 있지만 관리하기에 따라서 분해청소가 쉽다는 장점도 있다.
그깟 싸구려 기계식 키보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얘기하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한동안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나에게는 큰 사건이다. 게다가 이렇게 존재감 있는 녀석이 하나 생긴 덕에 전보다 컴퓨터앞에 자주 앉게 되고, 그러다 보니 1년 넘게 쓰지 않던 글도 다시 쓰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살다보면 별 것 아닌 일이 어떤 계기를 만들어 사람의 행동을 바꾸기도 한다. 조용한 방구석에서 혼자 기계식 키보드의 요란한 타건음을 들으면서 글을 쓰다보니 결혼 전 한창 직장에 다니던 때가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간 크게도 가끔씩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일을 마무리 짓곤 했다. 어차피 혼자 자취하던 터라 집에 가서 일을 하나 사무실에서 일을 하나 크게 차이가 없었다. 고요한 사무실에서 울려퍼지던 타닥타닥 거리던 키보드 소리가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기계식 키보드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것 같다.
남편은 오랫만에 사준 선물에 내가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보였는지 내친 김에 마우스도 게임용으로 바꿔줄까 물어보았다. 안 그래도 요 근래 마우스 움직임이 좀 뻑뻑해 진 것 같기는 했다. 또 못이기는 척 하고 이번에는 새 키보드와 똑같은 하얀색 게임용 마우스를 골랐다. 그냥 보면 하얀색 평범한 마우스지만 전원이 켜지면 테두리가 무지개 빛 LED로 빛나는게 키보드와 꼭 세트같다.
장비가 업그레이드 됐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전보다 컴퓨터를 부지런히 사용하는 일만 남았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얼마나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시끄럽고 빛나는 키보드가 생겼으니 아마 그냥 둘 수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