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흰머리

by apricot

"이제부터는 염색 안 할란다"


어느 날 엄마가 선언했다. 새치가 나기 시작한 30대 중반부터 환갑이 될 때까지 한 두 달에 한 번씩은 꼭 빼놓지 않고 짙은 밤색 컬러로 염색하던 엄마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염색을 하다 보면 어쩌다 한번 정도는 남의 손에 맡길 법도 하지만 짠순이 엄마는 그 긴 세월 동안 매달 본인의 손으로 직접 염색했다. 내가 기억하는 염색약의 종류만도 수 십 종이다. 너무 독하고 해로워서 두피가 아플 지경인 약국에서 팔았던 싸구려 염색약부터 최근까지 애용하던 샴푸처럼 거품만 묻히고 바로 헹궈내면 되는 편리한 염색약까지 브랜드는 다 달랐지만 항상 짙은 밤색 컬러를 고집했다.


엄마는 동안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같이 외출하면 항상 엄마가 아닌 이모가 아니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최근에도 엄마와 같이 옷가게에 갔다가 40대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50대였던 아주머니한테 같은 소리를 들었다. 60대지만 50대처럼 보이는 엄마와 50대지만 40대처럼 보이는 아줌마의 동안 배틀에서 나는 30대지만 40대로 보이지는 않을까 혼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엄마의 새치머리는 닮았지만 동안 외모는 닮지 못했다.)


어쨌든 엄마가 남들보다 10년 정도 젊어보인 이유는 얼굴 생김도 있겠지만 남보다 풍성하고 건강해 보이는 밤색 머리칼도 한몫한다. 대부분의 40대, 50대 여자들이 나이가 들면서 머리칼이 빠져 고민일 때도 엄마는 숱 많은 밤색 머리를 어떻게 단정하게 다듬을지 더 고민했다. 머리숱이 조금이라도 많아 보이도록 뒤통수에 잔뜩 힘을 주는 헤어스타일은 내 결혼식 날 혼주 메이크업했을 때 빼곤 엄마가 한걸 본 적이 없다.


그런 엄마가 앞으로 염색하지 않고 흰머리를 그냥 두시겠다고 선언하니 내심 놀라웠고, 서운했고,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평생 남보다 젊어 보이는 모습으로 사실 것만 같았던 엄마가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던 숱 많은 밤색 머리를 쉽게 포기하다니 놀랐고, 엄마의 젊은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했다. 하지만 매달 지겹도록 겪었던 독한 염색약 냄새와 눈 시림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더 자유로워지신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했다.


사실 엄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염색하기 싫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 뿌리 끝이 조금씩 희끗희끗해져 오면 이를 악물고 지독한 냄새나는 거품을 꼬박꼬박 머리에 문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이 들어서 관리 못하는 여자'로 오해받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외국에서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처럼 백발 숏컷을 한 멋진 여자들이 패션 화보에도 많이 등장하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여자들의 흰머리는 나이듬의 상징, 감춰야 할 대상처럼 생각해왔다. 그중에서도 나이가 어릴수록 새치머리를 그냥 두면 왜 저렇게 관리를 안 하고 사는지 한심하게 보는 시선이 많은데 특히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끼리 험담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엄마의 새치머리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 또한 이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겨우겨우 두어 달에 한 번씩 염색을 하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게으른 탓에 가끔씩 남의 손에 맡기기도 하지만 미용실에 가는 것 역시 번거롭긴 마찬가지다. 엄마는 환갑 때까지 염색했는데 나는 앞으로 과연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까 싶다.


흰머리에 대한 엄마의 부정적인 생각이 바뀐 것은 아마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보고 나서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우리는 그동안 매스컴에서 연예인이 아닌 은발 머리의 여자가 그토록 당당하고 세련되게 비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강 장관은 염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머리는 감춰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지혜라는 것을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나이에서만 느껴지는 여유로움과 연륜, 은발 너머 빛나는 아우라는 그녀의 시그니처처럼 자리 잡았다.


엄마도 강 장관도 다시 염색을 한다면 아마 10년은 더 젊어 보일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나이가 되었기에 탈 염색을 선택했다.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당당함과 용기, 나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현명함,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 이 모든 것들이 바탕이 되었음을 알기에 엄마의 선언을 나는 응원한다. 그리고 멋 부리지 않은 듯 늘 멋쟁이인 엄마는 짙은 밤색이든, 은발이든, 백발이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 앞으로 한층 더 빛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실거라 믿는다.









\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강해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