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당근

by apric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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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남편과 한창 연애 중일때 당근송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나 보고 싶니? 당근! 나 생각나니 ? 당근!' 이런 식의 유치한 가사와 함께 당근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이미지가 합쳐져 있는 플래시 영상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듯 한 점 부끄러움 모르던 시절, 남편은 어느 날 당근을 양손에 든 채 내 앞에서 당근송을 부르며 춤을 췄다. 따라서 당근송이란 나에게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명곡이 되겠다.


요즘 낮에 회사에 간 남편이 가끔씩 전화를 걸어 '당근당근' 이라고 외친다. 예전에 낯 간지러운 사랑을 노래하던 당근송이 아닌 당근마켓이다. 당근송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과거의 내 모습은 없고, 이제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약속된 물건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얼마 전 살던 지역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했다. 새로 이사온 아파트는 전에 살던 집보다 더 좁아져서 물건을 수납할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동안 어떻게 이 많은 짐들을 다 지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5년 넘게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끊임없이 물건들이 나왔고 심지어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물건들도 있었다. 필요없고 낡아서 못 쓰게 된 것들을 모아서 버리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물건을 버리는 수고로움이 사는 수고로움 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중에서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물건들, 분명 나에게는 필요없지만 남에게는 요긴하게 쓰일 물건들은 남편이 모아서 당근마켓에 내다 팔았다. 이사를 준비할 때부터 아이들이 읽던 전집류들을 비롯해서 각종 잡동사니들을 당근마켓에 파는 남편이 신통했다.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인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나 헐값에 팔수 있느냐고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차피 나에게 필요없는 물건이니까 남에게 얼마에 팔든 별로 중요하지 않아. 처분하는게 중요한거지."


아이들 장난감이며, 책이며, 안쓰는 컴퓨터 부품, 작아져서 못입게 된 옷, 등등 지금까지 판매한 물품만도 꽤 된다. 도저히 돈을 받고는 팔지 못하는 것들은 무료나눔도 하고 식빵과도 교환하며 당근마켓을 열심히 활용하고 있다.


집 근처에서 물건을 교환하는 일은 거의 평일 낮에 이뤄지기 때문에 실제로 물건을 전해주는 것은 대개 내 몫이다. 물건을 살 사람이 집 근처에 도착하면 남편이 나에게 '당근당근'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건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집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부스스한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집 앞으로 나가 성공적으로 거래를 완료한다.


얼마 전 SNS에서 당근마켓을 이용하는 주부들이 거래는 주로 남편에게 맡긴다는 이야기를 보았는데 어째 우리집은 반대다. 나보다 알뜰살뜰한 남편을 둔 덕에 연락을 받으면 집 앞에 물건을 갖다 주기만 하면 되지만 사실 그것 또한 꽤 번거로운 일이긴 하다. 특히 집안일로 한창 바쁠 때나 다른 일을 막 시작하려고 할때 갑자기 '당근당근' 전화가 오면 확 짜증이 치밀 때가 있다.


어느 주말 낮에 있었던 일이다. 남편은 안방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있었고, 나는 배가 아픈 것을 꾹 참고 설거지를 간신히 마치고 막 거실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화장실에 있던 남편이 다급하게 "당근당근" 하고 외쳤다. 그것이 물건을 살 사람이 집 앞에 도착했다는 의미인 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약 3초간 갈등했다. 지금 화장실에 있는 사람보다는 아직 가기 전인 내가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동시에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당근 때문에 나가야 되나 싶어 성질이 났다.

"에이씨 나도 이때까지 참았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결국 내 사정이 더 급한 것을 눈치 챈 남편이 자신의 볼 일을 중단했고, 나는 무사히 일을 볼수 있었다.


우리집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구석구석에 쌓여있다. 아니 지금은 쓸모가 있는 것 같아보이지만 언젠가는 쓸모가 없어질 물건들도 수두룩할 터이다. 나에게는 쓸모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무엇이 된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고 환경에도 보탬이 되는 일이다.


지금도 가끔 남편에게서 가끔 '당근당근' 전화가 걸려오면 좀 싫긴 하지만, 또 그것이 때때로 몹시 곤란한 타이밍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어쩔수 없다. 가볍게 한숨 한번 쉬고 모자를 눌러쓰고 준비된 물건을 챙겨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판매자의 모습을 가장한채 집 밖으로 향하는 수밖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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