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

by apricot


낮동안 집 밖을 도통 나가지 않게 되는 날이 많아지면서 밤에 산책 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오가는 사람도 적은 밤에 남편과 함께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대낮의 환한 풍경과는 다른, 조금은 낯선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다.


매일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낮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밤 산책을 하다 보면 꼭 탐험가가 된 기분이 든다. 미지의 길을 향해 나가는 탐험가 같은 기분으로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어둠 속 멀리 보이는 저 길이 도대체 어디까지 연결이 되어있는지 잘 가늠되지 않을 때가 있다. 원래 가보았던 길보다는 처음 보는 길로 가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꼭 그런 어둠 속으로 나를 이끈다. 마치 토끼굴로 안내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토끼처럼. 그러면 나는 엘리스가 된 기분으로 마지못해 따라가곤 하는데 막상 가보면 또 다른 건물에 불빛이 있거나 금세 가로등을 만나 큰길로 다시 이어지기도 하고, 가끔씩은 도중에 길이 끊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한 번은 폐교된 지 몇 년 된 학교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눈앞의 거대한 건물에 불빛이라고는 하나 없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만나 당황한 적이 있다. 남편의 손을 꼭 붙잡고 핸드폰 불빛으로 발아래를 비추면서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내딛는데 어렸을 때 가봤던 귀신의 집 이후로 그렇게 떨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죽은 귀신보다 산 사람이 더 무섭다고 여기는 나이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내 발 밑에 뭔가 나타나 확 붙들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오금이 저렸다. 한밤 중에 길을 잃고 밤새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괴담까지 떠오르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밝은 길을 두고 굳이 어두운 길로 가보자 했던 남편은 귀신의 집에 따로 안 가도 되겠다며 낮에 보면 별것 아닐 텐데 너무 겁먹지 말라고 다독였다. 끝없이 이어진 미로를 탈출하는 기분으로 간신히 어둠 속을 빠져나왔지만 정말이지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10분이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걷다 보면 가끔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개가 짖어대서 놀라는 일도 부지기수다. 인적이 드문 시골집에서 왜 개를 키우는지 알 것 같다. 낯선 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영리한 개들은 짖어 대기 시작한다. 최첨단 경비업체 세콤보다도 빠르고 정확하다. 그럴 때면 늦은 시각에 남의 대문 앞까지 와서 시끄럽게 만든 것 같아 송구할 때도 있고, 어둠 속에 묶여 있는 개가 안쓰럽기도 하다. 개를 키워본 적 있는 남편은 저렇게 맹렬하게 짖어대는 개 중에는 사람의 관심이 고픈 애들도 많아서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어쩔 줄 모른다고 했다. 불쌍한 마음은 들지만 그리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어렸을 때는 짖는 개들을 많이 무서워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해 짖어대는 개와 마주하는 건 사양하고 싶다.


밤길을 걸으면 낮과는 다른 풍경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하나둘씩 피어나는 봄꽃들도 밤에 보면 생경한 느낌이다. 낮에 보는 꽃들도 당연히 아름답지만 밤에 보는 꽃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낮에는 꽃잎 색이 진하고 화려할수록 눈에 띄지만 밤에는 꽃잎의 색이 밝을수록 눈에 잘 띈다.

햇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보이는 목련은 어둠 속에서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꽃잎은 크지만 백색이라 청초한 멋이 있는 목련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교화이기도 해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았던 꽃이다.

이른 봄 어느 집 앞 가로등 아래 우연히 만난 목련은 이렇게 화려한 꽃이었나 싶을 만큼 눈부시고 새하얗게 빛났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조명을 켜놓은 것처럼 빛이 나는 목련 나무 앞에서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어 기어코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목련이 밤에 화려하게 빛난다면 어둠 속에 보는 밤 벚꽃은 낮보다는 수수한 느낌이다. 가지마다 여러 송이가 달려있어 여전히 탐스럽고 볼륨감이 넘치지만 대낮에 보는 것처럼 화사한 핑크빛은 아니다. 아쉽게도 이 동네의 벚꽃은 다른 지역보다 늦게 피었는 데다 이제 좀 만개했나 싶을 때, 비가 내리는 바람에 겨우 며칠 만에 지고 말았다. 환한 벚꽃 아래에서 함께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밤에라도 벚꽃이 핀 길을 함께 걸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봄에 피는 꽃 중에 향이 가장 좋은 라일락은 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어렸을 때는 보랏빛 라일락의 떨어진 꽃가지를 주워다가 코를 킁킁대면서 향도 맡아보고 책갈피에 끼워두기도 했다. 최근에는 라일락을 자주 볼 수 없었는데 얼마 전 밤 산책 중에 라일락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란. 비록 보랏빛이 아닌 하얀 라일락이긴 했지만, 집 앞마당에 심어놓은 작은 나무였지만,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잠시 마스크를 벗고 향기를 맡아보았다. 내 기억 속 봄의 향기 그대로였다.


저녁 식사 후 운동삼아 시작한 밤 산책은 가끔은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이제는 하루라도 빼먹으면 서운할 지경이 됐다. 남편과 손을 맞잡고 연애하던 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은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재미있다.


며칠 전 인터넷 서점에서 유희열의 '밤을 걷는 밤'이라는 신작 에세이가 출간된 것을 보고 예전에 그의 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었던 나는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서울의 밤거리를 산책하는 내용인데 역시 언택트 시대에는 밤 산책이 트렌드인가 보다. 여기는 지방 소도시라 서울처럼 도시의 화려한 불빛은 없지만 조용하고 여유로운 길 가운데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오늘은 또 어떤 길에 접어들지, 어떤 풍경과 마주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한적한 밤거리를 걷는 시간은 이 곳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시간이자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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