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편. 마지막 깨달음, ‘공’ ‘열반‘ ’해탈‘

by 하늘담
생은 소멸했다.
청정한 범행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일을 끝마쳤다.
다시는 이와 같은 상태로 되지 않는다.
- 붓다 제자, 아라한 소나 존자 -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만물의 “공성”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공”을 깨닫는 것을 각자의 존재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면 “무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을 예로 들면 사람안에 무언가 있어서 눈을 통해서 대상을 보고 어떤 형상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작용이 보는 대상과 상호 작용하여 어떤 형상이 만들어 지는 것 뿐입니다.

사람속에 무엇인가 있어서 대상을 보고 느끼는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작용이 대상을 만나서 느낌과 생각이 발생할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연기성’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형상, 느낌, 생각, 의지, 의식 등의 덩어리를 사람이라고, 나라고 착각 할 뿐입니다.(불교에서는 ‘오온’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착각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그래서 불교에서는 만물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명“을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다른방법으로 설명하면

바람이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기압차이에 의해서 공기가 이동하는 것을 바람이라고 부를뿐입니다.

비라는 존재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증기가 응결하여 밑으로 떨어지는것을 비라고 부를 뿐입니다.

위에 설명했듯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고정된 존재라던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관계성에서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공”을 다른말로 “무자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각자 각자 존재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면

개인 개인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있을 뿐입니다.

현상 이라고 이해하면 쉬울것 같습니다. 착한사람, 악한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착한 현상, 악한 현상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업보”는 있어도 “작자”는 없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나’라는 착각이 만들어 지는 과정, 즉 ’아상‘과 ‘에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붓다는 ‘12연기‘라는 가르침으로 상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상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연기성”을 머리로 이해 하면서도 ”내가 대상과 연기한다“라고 또 착각을 하고, “윤회”를 이야기 하면서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삶을 이어간다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무아”를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의식속깊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 각자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사“입니다. A라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삶 자체가 진정한 “나” 입니다.

이러한 존재가 무엇을 집착하고 무엇을 잡을수 있겠습니까?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부는것에 괴로움이 어디있겠습니까?

내가 어디있고, 너가 어디있겠습니까? 전체를 한덩어리의 “통의식”으로 바라보게 되겠죠.

이렇게 진정한 ”무아“를 깨달으면 끄달릴게 어디있겠습니까?

“무아“ ”공“을 깨달으면 ”대자유인“이 될수밖에 없겠죠.

에고가 무너진 곳에는 허무감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만이 있겠죠.

헤아릴수 없는 삶을 살아오면서 쌓여진 카르마, 업장을 회피하고 도망치려고 발부둥 치는것이 아니라, 이제 용기있게 더 성실히 업장을 경험해주고 받아들여 훨훨 털어내겠죠.

그래서 ”공성“을 깨달아서 모든 엉켜진 실타래를 끊어버리고 태워버리기 때문에 열반, 해탈이라고 합니다.​


P.S

붓다께서는 이러한 만물의 ‘공성’을 설명하시려고 ‘무아‘라는 용어도 사용해보시고, 제행무상‘이라고 표현도 해보시고, ’연기법’이라고 설명도 해보시고, ‘오온‘이라는 용어로도 설명하셨습니다.

또 이보다 더 쉽게 가르쳐 주실려고 그 과정을 하나 하나 풀어서 ‘12연기’ ‘12입처‘ ’육근 육경’ 용어로 우리들에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붓다께서 중생을 세심하게 신경쓰시는 자비와 사랑에 고마움을 느끼고, 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애정어린 가르침을 주신것에 무한한 존경심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