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by 하늘담

‘사랑’이라는 말은 때로 너무 흔하게 쓰이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신비롭고 심오합니다.

사전에서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하지만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깊은 방식이자,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가장 순수한 언어입니다.

다양한 전통에서 바라본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는 사랑을 자비(慈悲)라 부릅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고통 없이 행복하길 바라는 무조건적인 마음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랑은 봉사, 용서, 그리고 희생입니다.

자기 자신을 넘어 타인을 위한 삶, 가장 높은 차원의 연대를 실현하는 길이라 말합니다.

플라톤에게 사랑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진리, 즉 선(善)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더 높은 존재로 이끄는 다리라고 말합니다.

인도 철학은 사랑을 우주의 본질로 봅니다.

사랑은 곧 브라만, 즉 개인과 우주가 하나임을 자각하는 통합의 에너지입니다.

유교는 사랑을 인(仁)이라 말합니다.

도리를 따르고, 타인을 따뜻하게 배려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는 인간다움의 실천입니다.

노자는 사랑을 말 대신 무집착과 포용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 그 자체가 사랑임을 가르칩니다.

이처럼 사랑은 언어와 문화, 종교를 초월해 가장 본질적인 가치로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결국 이타심, 타인을 위한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이타심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답은 아마도 이것일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이 근원적으로 하나임을 자각할 때,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의식, 하나의 존재, 하나의 생명이라는 통찰이 사랑의 가장 깊은 뿌리입니다.

이 ‘하나됨’의 통찰은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분리의 환상’을 넘어설 것을 말합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은 곧 브라만이다.”

개별 존재와 우주의 근원이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선언합니다.

장자는 “천하의 만물은 모두 하나다.”

도(道)의 흐름 속에서 모든 존재는 차별이 없는 하나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연기되어 있다.”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적으로 생겨나며, 서로 분리어 있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은 본질적으로 에너지의 파동이며, 관찰자와 피관찰자 사이에 실질적 경계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하나의 목소리를 냅니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홀로그램 이론으로 이 부분을 좀더 들여다보면,

홀로그램은 전체 이미지를 담은 사진이지만, 놀랍게도 그 일부분을 잘라내도 그 조각 속에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즉, 부분 속에 전체가 깃들어 있고, 전체는 부분 속에 살아 있습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타인, 나와 자연, 나와 우주 사이에 실제적 경계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정보장, 하나의 생명, 하나의 빛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가 아니라,

우주 전체가 하나의 방식으로 드러난 존재라는 통찰을 말합니다.

사랑은 그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입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

우리가 서로의 일부라면, 서로가 서로를 반영한 거울이라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