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살아남기, 사랑이
그해 여름 우리 부부는 서울 살림살이를 그대로 남겨둔 채, 유치원에 다니던 7살 사랑이를 데리고 미국 워싱턴 달라스공항에 도착했다.
며칠간의 여행은 아니었다.
메릴랜드에 사는 시누네서 우린 커다란 짐가방을 풀었다.
머릿속은 기대와 걱정,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도착 며칠 후 사랑이는 저먼타운에 있는 댈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은 9월 입학이라 사랑이는 한국에서 보다 6개월 먼저 입학하게 되었다.
영어라고는 한두 마디 밖에 모르는 데다, 담임인 뚱뚱한 스테파노스 선생님은 유색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은 백인이었다.
유일하게 의지가 된 반 친구는 옆자리를 지켜준 중국계 빅토리아였다.
사랑이는 아침마다 낯선 학교에 가기 싫어했고, 학교에 가서도 울기만 해서 집으로 데려오는 날이 많았다.
사랑이는 먹는 음식에는 큰 거부감이 없었다.
라쟈냐, 그릴드치즈, 피자, 샌드위치.
고깃값이 비교적 저렴해서 스테이크를 자주 먹었다.
한인마트에 다녀오는 날에는 김치에 배추를 섞고 된장도 가미한 김치찌개를 끓여 먹었다.
가끔 삼겹살을 구워 먹거나 만두를 만들어 먹는 날도 있었다.
주말 아침은 무조건 라면이었다.
힘들어했던 학교생활과는 달리 사랑이는 동네에선 신나게 지냈다.
사촌언니 쏘냐는 긴장한 사랑이를 데리고 온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다.
미국에서 사랑이는 쏘냐언니 껌딱지였다.
옆집 사는 애슐리는 한국인 부모를 둔 교포 3세였다.
사랑이 또래였던 애슐리는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외모가 한국인이라 사랑이에게는 힘이 되어준 친구였다.
할로윈데이에는 마녀복장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호박바구니에 사탕과 초콜릿을 받아왔다.
롤러블레이드를 함께 타고, 마당에서 보물 찾기도 함께 했다.
사랑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처키치즈였다.
게임도 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는데, 아이들은 그곳으로 사랑이를 초대해 주었다.
아이들에게는 흑인, 백인, 동양인, 히스패닉이 따로 없었다.
가장 고마운 일이었다.
친구들과의 추억을 안고 서울로 돌아온 사랑이는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