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3살 어린 동생을 옆에 앉혀두고 창 밖에다 "엄마 언제 와!"하고 외치는 일 뿐이었다. 무슨 일인고 하면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엔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매 방학이면 어린 우리들을 공주 할머니댁에 며칠씩 맡겨두곤 하셨다. 우리를 공주에 데려다 주시며 엄마는 내게 신신당부했다.
"딱 열 밤이야. 더도 말고 열 밤. 열 밤만 할머니, 할아버지랑 자면 엄마가 다시 올거니까 오늘 밤에는 울면 안돼. 엄마가 안오는거 아니잖아."
8,9살 쯤 나이를 먹었던 나는 3살이나 어린 동생도 옆에 있었기에 당차게 안운다고 선언을 했다. 그 땐 진짜로 안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은 엄마가 내 눈 앞에 보이니까. 나는 지금도 일어나지 않은 일에 감정이입하기를 힘들어하는데, 그 시절엔 오죽했을까. 할머니댁에 도착해서 짐을 내리고 나름의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면 엄마가 다시 한 번 더 안심을 시켜주시고 아빠랑 둘이서 문 밖으로 나가는데, 그 풍경을 보자마자 나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야. 니가 울면 동생도 운다. 어여 계란찜이랑 저녁 먹자. 자꾸 울면 망태할아버지 온다고 했는데? 아이고 할머니는 무서워. 저기 망태할아버지 오는 소리 들리잖어!"
엄마가 눈 앞에서 사라진 것도 서러운데, 동시에 머리 속에서는 무시무시한 망태할아버지가 아이들을 수레에 쌓아 싣고 가는 모습이 떠올라 더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울면 데려간다는데 너무 무서워서 안 울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한 숟갈씩 떠 주시는 저녁을 눈물 콧물 범벅되어 먹고나면 어쩔 도리 없이 지쳐 잠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다시 자지러지게 우는 일은 없었다.
그 시절 할머니댁에는 컴퓨터도, 게임기도 아무것도 없었다. 심심할까봐 집에서 가져온 장기, 체스판이 우리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앞면은 장기판, 뒷면은 체스판, 펼치면 바둑판이 되었던가.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고 '열 밤째는 아직도 멀었네.' 하는 생각이 들 때 쯤이면 나는 동생에게 제안을 했다. 거실 창문에 옹기종기 붙어서 누가 더 크게 엄마를 불러서 엄마가 듣게 만드는지 게임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물론 게임의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때는 정말 들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러면 하루라도 엄마를 보게될 날이 앞당겨지는 줄 알았다.
할머니 댁에서 몇 번의 방학을 더 보내며, 손가락 열 개로 세기에는 역부족인 나이가 되었다. 12살 쯤이었나, 엄마가 수학여행을 가셔서 집을 비운 저녁(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아빠도 퇴근하시기 전에 비어있는 안방에서 오늘 밤엔 오지 않는 엄마의 냄새를 맡으며 혼자 훌쩍였다. 16살 무렵부터는 엄마가 집을 비웠다고 울지는 않을 수 있게 됐지만, 다른 일정으로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면 꼭 전화를 걸어 언제오는지 묻곤 했다. 언제부턴가는 사실 엄마가 금방 오실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돌아오는 엄마의 반응이 좋아서 일부러 전화를 걸곤 했다.
"엄마 어디야? 늦었는데 언제와?"
"엄마 이제 곧 갈거야. 엄마 늦는다고 걱정해주는 사람은 우리 딸밖에 없어."
이제는 엄마가 늦는다고 울거나 보채지 않을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손가락 발가락을 다 써도 나이를 세기에는 모자랄만큼 컸는데 아직도 엄마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엄마의 부재를 잊어보기 위해, 동시에 엄마의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해 그녀를 담은 글을 써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