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라는 선물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 혹은 물건에 대하여

by 사월

대전에 살 때는 책방에도 자주 가고 독서모임에도 종종 참여했었는데, 천안으로 이사를 오고 난 후로는 책방에 다니질 못했다. 이사 온 지 벌써 1년 반이 되어가는데 말이다. 지도 어플에 몇 군데 가보고 싶은 책방을 진작에 저장해 두었지만, 막상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최근 어떤 고민에 마음을 쓰느라 한 자리에 가만히 고여있는 기분이었다. 답답하고 지치는 느낌으로 3주를 보내고 났더니 정말 마음이 동났나 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멀고 먼 책방을 단숨에 예약한 걸 보면.


집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책방 <모랭이숲>. 차로 40여분을 달려가는 내내 걱정이 앞섰다. '가서도 하던 고민만 계속하면 어쩌지?' 최근에는 책이나 글은 물론이거니와 tv 예능 프로그램이며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먼 길을 달려 책방에 도착했다. 마당 앞에 서있기만 해도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풀내음 가득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책방에 들어가니 책방지기 님께서 공간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시고 웰컴티를 내주셨다. 이제 3시간 동안 책방은 오롯이 내 공간이다!


언제 무슨 걱정을 했었나 싶을 만큼, 금세 책방에 푹 빠져들었다. 주위를 둘러싼 책들과 책방지기님의 정성 가득한 큐레이션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만 것이다. 역시 책은 눈으로 즐기고 손으로 느껴야 한다. 인터넷 서점에 더 많은 책이 있고, 밀리의 서재에도 읽을 거리가 잔뜩이지만 서점에 와서, 특히 이렇게 개인의 취향을 듬뿍 담아 소개된 책들을 보고 있으면 다시 읽을 수 있을 것 같단 마음이 샘솟고 마니까.



마음에 들었던 동화책과 시집 한 권을 골라 가장 편안해 보이는 자리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얼마 만에 느낀 다른 세상에 대한 흥미인지. 그 마음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정말 오랜만에 잃어버렸던 '나'를 되찾은 기분이었으니까. 읽어야 한다는 초조함 없이도 자연스레 읽혔다. 때론 가만히 눈을 감고 공간의 소리와 향기에도 취해 보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책을 읽다 보니 목이 타서 준비해 주신 작두콩차(외할머니께서 직접 농사지어 말리신 차라고 하셨다.)를 한 모금 마셨다. 사랑이 가득 담긴 차라서 그런 걸까. 쌉싸름한 맛이 어디서 마셔본 커피나 차 보다도 깊고 진했다.


마지막 30분 동안은 마당에서 낮잠 자는 고양이들을 관찰했다. 그랬더니 정말 오랜만에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책방 한편에 마련된 방명록에 글도 남겼다. 내게 꼭 필요한 건 '틈'이었나 보다. 게다가 자기답게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만든 곳에서의 틈은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게 한다. 내가 나일 때 비로소 읽고 쓰고 싶다는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오고 말이다.


누군가 그랬다. 기꺼이 돈을 쓰게 되는 분야가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책방에 수많은 책이 있어도 유난히 마음에 쏙 들어오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을 만나는 날은 오래된 친구라도 본 것마냥 기쁘고 반가워 선뜻 지갑을 열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흔든 한 문장이 그 책 속에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 문장을 만나러 바로 오늘 이곳에 오게된 건지도 모르지.


손을 내밀어 보라
부서진 적 있는 심장을 초대하듯이
숨죽이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기쁨에게

<초대> 류시화


부서진 적 있는 심장을 초대하려면 얼마나 조심히 숨죽여야 할까. 나는 나를,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소중히 대한 적이 있었던가. 닫힌 저 문 앞에 내 자신이, 또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더 힘을 내보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마음이 뽀송뽀송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 조금은 더 잘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