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살자

나의 문제점과 그것을 보완하는 방법

by 사월

최근 들어 정말 고치고 싶은 습관이 하나 있다. 바로 무심코 핸드폰을 켜 의미 없이 쇼츠나 릴스 동영상을 끝없이 보는 행동이다. 스마트폰 세상 속을 전전하다 보면 시간 낭비도 낭비지만 내 마음속 불안을 증폭시킨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어떤 걸 안 하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시물, 왠지 모르게 날이 선 사람들의 반응,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까지. 그런 정보들에 젖어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세상이 무서워진다.


정작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느샌가 벌써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움츠러들고, 망설이고, 비교하고, 자책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서야 일기장에 나지막이 적어보았다.


현실에 살자.
현실에 살자.


지울 수 있는 어플은 삭제하고, 지울 수 없는 어플은 스마트폰 제일 구석지로 옮겼다. 무언가에 집중해야 할 때는 핸드폰 알람을 무음으로 변경해 놓고, 스마트폰을 보기 위해서는 일어나 움직여야 하는 곳에 휴대폰을 갖다 두었다.


그리고는 눈앞에 보이는, 실재하는 것들에만 집중해 보려 노력하는 중이다. 해야 할 일 목록에 밀려있던 일들도 차근히 처리해 보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그마저도 하기 싫을 때를 대비해 스티커 북도 구비해 뒀다. 무념무상으로 주어진 자리에 스티커를 붙이며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도파민에 얼마나 진하게 절여졌었는지, 처음엔 이 당연한 일과가 낯설고, 지루하고, 하기 싫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현실에 살자." 하고 되뇌며 무어라도 손에 쥐고 해 보았다. 하루 이틀 스마트폰을 보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현실의 일들을 해나가니 시간도 빨리 가고, 해낸 일들이 쌓이는 걸 보며 보람차기도 했다. 그렇게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현실에 살겠다는 다짐을 더 단단히 만들어 준 순간이 찾아왔다. 오후 진료가 없었던 어느 평일, 볼일이 있어 길을 나섰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한적한 버스 정류장에는 할머니 한 분이 친구와 통화를 나누고 계셨다. 통화가 끝나자 의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계셨던 게 문득 미안하셨는지 자리를 널찍이 비켜주시며 혼잣말 같은 대화를 시작하셨다.


"복지관에서 오는 길인데, 원래는 한 정거장 전에 탔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걸어왔어요."


한의원에서 일하며 개발한 가장 큰 능력은 바로 어르신들과 대화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예전엔 모르는 사람이 길이라도 물어보면 흠칫 놀라고 잔뜩 경계했었는데, 이젠 어르신들과 이야기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날이 참 뜨겁다는 말과 어디까지 가냐는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평일 한낮이라 그랬는지 온 좌석이 어르신들로 가득했다. 두 정거장만 더 가면 천안역이라 금방 자리가 날 걸 알았기 때문에 여유롭게 기둥을 잡고 서 있었다. 정류장에서 만났던 할머님께서 내 임산부 배지와 볼록 나온 배를 알아보셨는지 어쩔 줄 몰라하시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거셨다.


"여기라도 앉아요. 내 자리 내줄까요? 어디에라도 꼭 앉아서 가야 해요."


일어나시려는 걸 한사코 거절하고, 자리가 나면 곧바로 앉겠다며 찡끗 웃어 보였다.


요즘 알고리즘 덕분에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정보가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진다. 특히 그중에서도 대중교통에서 임산부가 겪는 불편을 담은 게시글도 눈에 띄었다. 정작 나는 자차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직접 겪은 일들도 아니었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접해서 그런지 마음속에서는 지레 날이 서고 경계심만 커져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정류장이 인연이 된 어르신의 그 참견이 정말 푸근하고 감사했다. 물론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해야 하는 다른 임산부 분들은 훨씬 더 안 좋은 상황을 많이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날 버스 안에서 양보하겠다고 나선 분도 어르신 한 분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한 분에 더 집중하고 싶어졌다. 그런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것, 그런 마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예상대로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금방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정류장에서 만났던 어르신도 나보다 앞서 내리시며 목적지까지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시 마주친들 알아보지 못할 인연. 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했던 따뜻한 마음과 희망. 덕분에 앞으로도 더 열심히 현실에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사실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은 곳이라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스스로도 굳게 믿고 싶다. 언젠가는 기쁨이에게도 그렇게 알려주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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