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해도 괜찮아.
초등학교 1학년, 학교라는 사회에 갓 진출한 나는 1년간 '부끄러움이 많은 이 성격을 어서 뜯어고쳐야 하는구나!'라는 중차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시절 내 관심사는 온통 악기에 꽂혀 있었다. 그런 나의 적성과 어릴 적 악기를 배우고 싶어도 가난해 배울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엄마의 결핍은 환상의 짝꿍이었다. 악기라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셨던 엄마는 바이올린 교실에 체크 표시한 방과 후 학교 신청서를 챙겨주셨다.
"어제 나눠준 가정통신문 있었죠? 혹시 신청할 사람 있나요?"
선생님의 물음에 아이들은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손 들어야 하는데. 신청자가 나밖에 없는 거야? 어쩌지?'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결국 손을 들지 못했고, 8살의 나는 손을 드는 게 부끄러워 배우고 싶은걸 신청도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말았다. 엄마는 내가 신청서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왜 바이올린 교실에서 아무런 공지를 안 해주시지? 시작할 때가 됐는데..."
엄마의 걱정 어린 말에 심장이 덜컥했다. 부끄러워서 손을 들지 못했다고 말을 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던 나는 끝내 엄마의 궁금증을 풀어드릴 수 없었고, 결국 담임선생님과의 통화 끝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셨다. 황당하면서도 재미있으셨는지, 선생님과 엄마는 한참을 웃으셨다.
그 사건을 잊어갈 때쯤 학예회 준비를 해야 한다며 친구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을 준비해 오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부모님께 쓴 편지를 낭독하는 발표를 준비했는데,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선생님께서 '특별히' 지정해 주셨다. 아마도 나의 부끄러움을 타파하고 자신감을 키워주겠다는 명목으로 엄마와 담임 선생님께서 합동 작전을 세우셨던 것 같다.
학예회 예행연습 시간이 다가왔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엄마, 아빠 사... 사... 사랑해요..."
"더 크게! 이렇게 팔도 앞으로 쭉 뻗으면서 말이야. 엄마, 아빠! 사랑해요! 자신감 있게 읽어야지."
그 후로 실전에서는 어떻게 발표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기억은 선생님께서 내 팔을 잡고 쭉 뻗으며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했던 장면, 그리고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너무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었고, 울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조차 부끄러워서 그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던 일에서 끝난다.
수줍어 숨고 싶어 하고, 부끄러워 남들 앞에 나서길 싫어하던 내 성격을 엄마는 조금 답답해하셨던 것 같다. 이렇게 소극적이면 어디 가서 제 밥그릇 하나 못 챙길까 염려되어 안타까우셨을 것이라고 지금의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성격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 만무하다. 핀잔을 듣는 게 싫었던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무뚝뚝함으로 무장했다. 무뚝뚝하면 또 그런대로 혼나기도 하고 아쉽다는 잔소리를 듣기도 했었지만, 적어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보다는 무뚝뚝하게 있는 편이 좀 더 편안했다. 부끄러워서 가슴이 쪼그라들고, 숨이 짧아지고, 시야가 좁아지는 그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그렇게 엄마의 숙원 사업인 성격 개조는 실패로 돌아갔다.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해서 2~3명 이상의 사람들이 나를 동시에 쳐다보기만 해도 눈동자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리고, 하려던 말은 다 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게 되는 일도 일쑤이다. 하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다. 그동안에는 부끄러운 감정이 절대 느껴서는 안 되는 척결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평생 함께 가야 할, 의외로 재미있고 귀여운 친구처럼 생각한다는 점이다.
부끄러운 걸 들키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내가, 요즘에는 부끄러우면 부끄럽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숨겨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조금 버벅댈 수도 있어요. 이해해 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나를 배려해주고 때론 수줍어하는 모습을 귀엽게 봐주시는 특혜를 누리기도 한다.
부끄러울 권리를 되찾고 나니 오히려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도 내볼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덜 무섭다.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찰나의 순간은 당황스럽지만 그 당황스러움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껴보려 노력한다. 그러면 생각보다 굉장히 짧게 지나가고, 순간을 견딘 대가로 더 깊은 편안함과 즐거움이 찾아오곤 한다. 이렇게 부끄러움 맷집도 점차 커지는 게 아닐까.
부끄러움을 숨기려 애쓰던 시절 동안 때론 불편하고, 힘든 날도 있었지만 이런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는 진실을 배우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혹시 독자분들 중에서도 유독 불편하다 느껴지는 감정이 있으시다면 그 감정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던 뿌리 같은 경험은 무엇인지, 그 감정이 찾아올 때 신체적으로는 어떤 변화들이 나타나는지 관찰해 보시길 바란다.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어느 순간 불편했던 감정과의 관계가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누구나 부끄러워할 권리(혹은 각자의 불편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느낄 권리)가 있다. 그리고 마음껏 부끄러워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