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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18. 2023

덕질은 계속된다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 천둥 지음

  봄바람이 분다. 따뜻한 날인줄 알고 산뜻하게 얇은 옷을 걸치고 나왔는데 예상과 달리 매서운 찬 바람으로 나를 놀라게 하는 봄바람. 그런 바람이 분다는 건 곧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뜻이다.


 골프 선수는 박세리, 야구 선수는 박찬호 밖에 모를 정도로 스포츠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치맥이나 먹을 생각에 부풀어 야구장에 처음 갔다. 전광판에는 작은 눈이 더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장난기 가득 웃고 있는 한 선수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 모습에 푹 빠졌다. 그는 바로 ‘악마의 2루수’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다이빙 캐치를 멋있게 해내는 국가대표 2루수, 정근우 선수다.


 작지만 탄탄한 몸으로 매 경기 전력을 다해 뛰는 그가 좋았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누구보다 높이 날아 공을 잡는 그가 좋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끝내기 홈런을 쳐 모두를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 그가 좋았다.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메인 테마곡 리듬에 맞춰 부르는 “이글스의~ 정근우~”하는 응원가도 좋았다. (이제는 저작권 문제로 부를 수 없는 응원가지만 여전히 레전드 응원가로 회자된다.) 그렇게 나는 정근우 선수의 팬이 됐고, 자연스레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고 있었다.


 정근우 선수가 SK 와이번스 출신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래도 은퇴는 한화에서 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말년에 LG트윈스로 이적했고 1년 만에 은퇴했다. 그때부터 야구를 챙겨보지 않았다. 항상 bgm처럼 틀어놓곤 하던 야구 중계였는데. 바쁜 날엔 하이라이트라도 챙겨보며 경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싶어 했었는데. 가끔씩 기분전환 겸 야구장에 가기는 했지만 최애 선수가 없는 우리 팀은 영 허전할 뿐이었다.


 남편은 나와 달리 야구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회사의 야구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요즘은 나보다 먼저 야구계 소식을 발빠르게 전해준다. 각종 프로야구 팀의 유튜브를 섭렵하더니 이번 시즌 한화 이글스의 행보가 너무 기대된다며 자기도 한화의 팬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드디어 한 명 낚았다!^^) 새로 뽑힌 신인 선수들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쉽게 믿지 않는다. 주목을 받던 신인들이 막상 프로에서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던 선수가 의외로 프로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문현빈’이라는 신인이 눈에 띈다. 짱구같이 진한 눈썹이 매력 포인트인 선수,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선수치고 작은 키지만 땅땅한 몸집, 신인임에도 기죽지 않고 선배들과 금방 어울리는 친화력, 빠른 발과 멋진 수비, 게다가 2루수라니. 정근우 선수가 어렸을 때 바로 저런 느낌이었을까? 오래간만에 푹 빠질 만한 새로운 선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가 부풀었다.

 



 갱년기에 접어들며 국카스텐이라는 밴드에 빠져 생애 첫 덕질을 해본 경험에 대해 쓴 책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를 읽었다. 무언가에 푹 빠져 열광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한 사람을 얼마나 반짝이고 살아 숨 쉬게 만드는지. 작가의 가슴 뛰는 붉은 열정을 따라가며 나를 돌아보니, 꼭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회색빛으로 물든 마음이 느껴져 힘이 쭉 빠졌다. 나도 분명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가슴 설레고 열광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정근우 선수가 은퇴하고 코로나도 겹치며 2~3년 간 야구를 멀리한 후로 완전히 잊고 지내던 마음이다.

     

 얼마 전엔 <유퀴즈 온 더 블록> 김성근 감독 편에 정근우 선수가 인터뷰로 잠깐 출연했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야구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정근우. 그 모습을 보는데 나도 함께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따라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이 내심 반가웠다. 내게도 존재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올봄에는 다시 야구 중계를 틀게 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야구장에도 더 자주 가게 될 것이고, 요즘 나온 응원가도 어느새 다 외우게 되겠지. 응원가를 힘차게 부르며 관중석을 메우는 함성 속에 파묻히는 그 느낌이 좋다. ‘최! 강! 한! 화!’를 한 목소리로 외치며 육성 응원을 할 때 심장이 벅차오르게 터질 것 같은 그 느낌이 좋다. 경기가 안 풀릴 때 함께 분개하고 결정타나 호수비에 함께 환호하는 그 순간이 좋다.    

  

 다시 야구를 보며 내 안에 여전히 반짝이는 생기가 있음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매일 확인하고 싶다. 회색빛인 줄 알았던 내 마음도 다시 주황으로 물들 것이다. 변화무쌍한 봄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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