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송은정 씀
브랜딩 디자이너 미즈노 마나부가 쓴 <‘팔다’에서 ‘팔리다’로>에서 그는 자기 자신 이상으로 보이려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긴장하면 평소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평소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면 전달될 것도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은 어차피 자신일 뿐이라며 정색하고 나서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p.100
최근 들어 더 적극적으로 '나 이상으로 보이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대로도 충분해.'라는 말을 되새기며 살고 있다. 그만큼 나는 나 이상으로 보이기 위해 애써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허황된 욕심을 내며 살았다. 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노력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게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직장에서도 자기 자신 이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쓴 것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더더욱 심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아직 한의사 면허증의 글씨가 다 마르기도 전이었던 그때, 스스로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누가 나 같은 초짜 한의사에게 진료받길 원하겠어. 나라도 경험이 풍부하고 경력이 많이 쌓인 교수님께 진료받고 싶을 거야.'라는 생각에 매일 무너지는 것이 일상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생각하여 무조건 친절하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모든 환자의 니즈를 맞추고 싶었다.
예를 들어 A 환자는 a를 원한다. 그럼 나는 내 능력에 +a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엔 A 유형의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B 환자는 b를 원한다. 그러면 또 +b를 했다. 그렇게 +c, d, e, f..... 끝이 없었고, 점차 혼란스러웠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어떤 한의사이지? 한의사로서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전쟁터는 폐허와 다름없다. 몸과 마음은 지쳐 있고, 주변엔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p.140
학교 공부는 물론이거니와 졸업한 후에도 내게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내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부족했다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a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a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b를 못하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b를 하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로 c는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무언가 못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느낌으로 살아갈 때 나는 아무런 의욕도, 의지도 낼 수 없는 절망의 상태였다. '이 일이 나와는 맞지 않는구나.', '이 일을 평생 해내기에는 나의 그릇이 너무 작구나.'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도망치고 싶었다.
그 안정이, 어떤 곳에서 일하는지와 상관없이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확신이 생기면 얻어지는 거였구나 생각해요.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p.204
2022년에 들어서 무계획 쉼을 결심했다. 처음 쉬기 시작했을 때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게 되어 신이 나고 좋기는 개뿔.... 너무나도 막막하고 두려웠다. 그러나 다시는 스스로의 등을 떠미는 방식으로 일터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염없이 쉬다 보니 내가 대학 입시 준비를 시작했을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때부터 하루빨리 고등학교 진도를 빼기 위해 선행학습의 속도를 올렸다. 그땐 이것도 늦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미친 짓이었다.)부터 약 17년 간 맘 놓고 쉬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이들은 배부른 고민이라고도 말한다. 누구나 그 정도의 고생은 다 하면서 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분들도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이제는 내가 나를 좀 인정해 주려고 한다. 나는 이게 좀 버거웠다고, 내가 많이 지쳤다고, 그게 설령 자위에 그치는 일이 될지라도 그렇게 해야겠다.
6개월쯤 쉬었을 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출산을 앞둔 선배가 3개월만 한의원을 봐줄 수 있겠냐고 부탁을 해온 것이다. 그곳은 작은 동네 한의원이었는데, 진료에 대한 자유도 많이 주신 편이어서 비교적 내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었다. 얼마간의 숨 쉴 틈을 줬을 뿐이었는데도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사회에 나온 후 처음으로 일이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에게 부족한 것만을 보는 눈이 아닌,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할 수 있는 것이 충분히 많다는 생각과 지금 이대로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시선의 변화는 지나고 보면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것 같지만, 그 변화 속에는 긴 시간과 수많은 노력과 다양한 방황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역사에서 변곡점이 되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를 거치며 경력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경력이 있다는 것은 그 일에 노련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를 지키며 일하는 방법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동안 거쳐온 일터들은 사회 초년생에게 중심잡기 연습을 할 수 있게 해 준 곳들이었다.
앞으로는 어느 곳에서든지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자리를 지키며 시간을 꾸역꾸역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도 충분한 나로서 주어지는 일들을 충실히 겪어 내고 싶다. 그렇게 어엿한 사회인으로서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