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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y 17. 2023

칭찬 없이도 잘 살고 싶어서

일상 속 보물찾기

 지난 연말연시, 야심차게 수영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가 3달도 채 다니지 못하고 그만뒀다. 그 실패담에 관한 이야기다. 수강생이 한 반에 너무 많이 몰려 있다는 이유로 몇몇을 윗 반으로 보냈는데, 내가 자꾸만 그 틈에 들어가 있었다. “수영할 때 내가 줄의 어디쯤 서야 앞뒤로 걸리지 않고 나갈 수 있을지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앞사람보다 속도가 빠르다 느껴지면 어서 양해를 구하고 그 사람보다 앞줄에 서세요.” 고급반에 처음 갔던 날 선생님께서 당부한 점이었다. 자신이 없었던 나는 점점 뒤로 가다가 어느새 제일 마지막에 서게 됐다.


 아무리 열심히 발을 차고 팔을 저어봐도 꼴찌 뒤를 다시 쫓아오는 첫 번째 수강생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전력을 다해 레일 끝에 가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으면 어느새 끝날 시간인지 사람들이 저만치 먼 곳에 옹기종기 모여 서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마무리 멘트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쓸쓸히 수영해서 합류할 때마다 꼭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것만 같았고. 아마 꼴찌 중에 꼴찌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나 보다. 꼴찌의 서러움, 창피함 같은 것들을 잔뜩 느끼다보니 수영장에 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고, 아침마다 일어나서 가기 싫다고 괴로워만 하다가 결국 그만두게 됐다. 수영장에 갖고 다닌다고 샀던 작은 사이즈의 스킨, 로션과 샤워 용품들이 이제는 화장실 서랍 한 켠에 고이 모셔져 있다.


 분명 초급반과 중급반에 있을 땐 수영이 재밌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수영을 그만두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나는 수영이 재밌었던 게 아니라 수영을 잘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좋았던 게 아닐까? 아니라고, 그럴리가 없다고, 인정하기 싫어서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기 까지도 마음 고생을 적잖이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칭찬 중독자라는 걸. 더이상 나에게도, 남에게도 잘한다고 인정받지 못하니 괴로움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칭찬을 먹고 자라는 아이였다. 칭찬 들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른들 말을 고분고분 들었으니까. 어쩌면 그런 면에서 꽤나 키우기 쉬운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책에서 보니 그런게 바로 어린 아이들의 생존 본능이자 자기 방어 수단이라고 한다. 어른들에게 사랑받아 살아남기 위한 나만의 전략이라나.


 그렇게 생존 전략에 투철했던 나는 비겁하단 생각을 애써 외면하며 결국 오래 해와서 익숙한 운동인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사실 요가도 못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운동과 달리 작은 매트 안에서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선생님들도 꼭 이런 말을 해주시고. “더 잘 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어려울 것 같으면 그 전 단계에 머물러도 좋아요.” 그런 선생님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나같은 몸치는 아마 아무 운동에도 정을 붙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잘 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해낼 수 있는 건 지금으로써는 요가 뿐인 것 같다.




 언젠가 동서양의 교육을 비교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영국 학생들에게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며 기록을 재서 알려줬는데 몇몇 아이들이 울먹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대체 제가 왜 달리는 걸로 평가받아야 하죠?” 그 인터뷰를 보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친구들에게 체육 시간은 그저 즐겁게 운동하는 시간일 뿐이었던 거다. 나는 수행평가 점수를 받으려면 기록을 재야만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당연하지 않은 나라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체육마저, 아니 미술과 음악과 무용을 비롯한 모든 것들에 점수 매겨지는 게 너무 당연한 듯 살아와서, 내가 무언갈 못한다는 느낌을 조금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못해도 괜찮아, 잘할 필요 없어.”하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려 노력해 봐도 수포로 돌아갔던 건 이미 잘 해야 한다고, 적어도 평균은 따라가야 한다고 길들여져 버린 무의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것들에 익숙해진 채 성인이 된 나에게 칭찬은 이제 짜디 짠 바닷물 같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들으면 뛸듯이 좋았다가도 오히려 갈증이 더 심해진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제는 칭찬에 끌려다니며 살기 싫다. 칭찬 없이도 잘 살고 싶다. 즐기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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