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 이웃들
한의원 근처에 작은 김밥집이 하나 있다. 처음에는 간판과 외관 분위기가 마치 카페처럼 예뻐서 눈에 띄었다. 프랜차이즈도 아닌 것 같은 동네 김밥집이 이렇게 예쁠 수 있다니! 포장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 김밥이 필요한 날이 오면 꼭 이곳에 먼저 와보겠다고 마음속으로 찜해두었다.
토요일 출근 전, 직원의 간식을 살 겸 김밥집에 들렀다. 포장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 테이블이 따로 없었고, 안쪽 주방이 바깥에서도 보일 수 있게 오픈돼 있어서 밝고 깨끗한 첫인상이 좋았다. 김밥을 주문하고 아담한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단골이 될 것 같단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아기자기한 식물들과 함께 손으로 눌러쓴 안내문들, 게다가 이달의 책이 사장님의 손글씨와 함께 놓여있었고,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김밥집에 와서 조용히 이달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정말 엄마가 싸준 김밥을 먹으러 온 것처럼 마음 한편도 같이 따뜻해진다. 간판에 적힌 '집밥 같은 김밥'이라는 문구처럼 정말 이곳에 왔다 가면 몸도, 마음도 든든해지는 느낌이 든달까. 그리고 그곳에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내 한의원도 언젠가는 이런 분위기로 예쁘고 평화롭게 인테리어 하고 싶단 마음이 샘솟는다.
오래된 한의원을 양수받아 편했던 점이 훨씬 많았지만 한 가지 가장 아쉬운 게 바로 인테리어다. 나름 정겹고 포근한 느낌 들긴 하지만, 요즘 느낌으로 세련된 맛은 덜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뭔가 내가 좋아하는 느낌은 분명히 있는데, 그 느낌을 현실로 구현해 내는 감각은 부족해서 이 공간을 완전히 나답게 활용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다른 건 몰라도 이달의 글 정도는 나도 흉내 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비좁은 한의원을 열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시도해 볼 수 있는 자리는 단 한 곳, 데스크에서 치료실로 들어가는 길목에 놓인 블랙보드 자리였다. 나름 강조하고 싶은 치료 내용을 소소하게나마 광고하던 자리였는데, 어쩌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예전엔 사장이 되고 나면 많은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좋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사장이 돼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달에 공휴일이 많으면 매출 걱정에 시달리고, 쉬겠다 마음먹고도 온전히 편치 않은 날도 많았다. 상사 눈치는 보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직원 눈치를 보게 되기도 한다. 아파도 쉴 수 없을 땐 서럽기도 하고, 토요일까지 진료를 하니 결혼식이나 가족 행사에 참석하기 어려울 땐 미안한 마음도 크다.
그런 생각을 하자 어디선가 갑자기 결단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그래, 이거라도 내 마음대로 해보자. 블랙보드 한 칸 만이라도 내 느낌을 팍팍 살려보자! 오가며 이 글귀를 보고 나라도 기분 좋아지면 그런대로 괜찮지 뭐.'
그렇게 마음먹고 첫 번째 한 줄을 어떤 글귀로 시작할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고르고 골랐다. 이왕이면 나와 환자 모두에게 힘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결국 지난달 읽었던 황보름 작가의 에세이 「단순 생활자」중에서 인상 깊었던 한 글귀를 선택했다.
삶은 대체로 고되고 힘에 부치지만
그럼에도 빛 하나쯤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
가끔 한 명이 빛의 존재를 잊으면
그 존재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게 우리 가족의 임무다.
황보름 저 <단순생활자> 중에서, p.139 6인용 테이블에 앉아
막상 써놓고 보니 뜬금없는 것 같아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게 뭐야?'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내 느낌대로 채우다 보면 그냥 '이런 한의원이구나.'하고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제 매달 달라질 우리 한의원의 한 줄을 고민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더 재밌게 읽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골라 쓴 이 한 줄처럼 한 달을 살아보고 싶다. 조금 더 나다운 공간에서, 조금 더 나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