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실 이야기
처음엔 그저 손주들 자랑하기 좋아하는 여느 할머니라고만 생각했다. 한의원에 오실 때마다 쉴 새 없이 손주들 자랑을 하셔서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대화의 말미는 항상 이랬다.
"어제도 손주들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 할머니 밭일 나가지 말라고."
이선옥 님(가명)은 인삼밭과 배추밭에서 일하시는 80대의 할머니다. 150cm나 될까 말까 하는 작은 키에 마른 몸을 이끌고 평생을 밭일하며 살아오셨다. 처음 만나 뵀을 때는 허리 통증도 심하고 무릎도 부어 있어서 일을 좀 줄여보시라고 타일렀다. 그럴 때면 매번 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말이다.
"아이고 그러니까요. 우리 손주들도 맨날 일 그만하라고 그런다니께. 그래도 어떡해요. 계속 나오라고 성화인걸 어떻게 모른 척 한대요?"
일 좀 줄이시라, 어떻게 그런대요 사이에서 대치하며 수개월이 지났다. 그렇게 선옥님을 여러 차례 겪으며 나는 단정 지었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데 이렇게나 고집을 부리시다니, 가족들이 참 힘들겠네 하고.
그러던 어느 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계가 어려우셔서 밭일을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고집하시는데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한 번은 평소와 다른 말을 건넸다.
"선옥님 오늘 일하고 오셨어요? 이 연세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면서, 이 정도 건강 관리 잘하신 분 흔치 않은데. 정말 멋지셔요."
선옥님의 작은 눈이 더 작아지며 활짝 웃는 표정이 됐다.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선생님 그거 알아요? 어제 침을 맞아서 그런지 오늘 밭일 갔는데 무릎이 안 아프대요? 다른 사람들이 웬일로 아프다 소리 안 하시냐며 놀랐다니까요."
그때 알았다. 선옥님께서 괜한 고집을 부리시는 게 아니란 걸. 일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끼고 어쩌면 더 나아가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란 걸 몸소 느끼고 계셨단 걸. 선옥님께 밭일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이젠 선옥님의 밭일을 무작정 말리지 않는다. 대신 열심히 일하고 오셨단 걸 인정해 드리고, 내일은 쉬는 날이라고 하시면 칭찬을 더 얹어드리곤 한다.
"오늘 일하면서도 아프지 않아 선옥님도, 동료 분들도 깜짝 놀라셨겠네요. 내가 이렇게 잘 해내고 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도 드셨겠어요."
이젠 온몸이 흙투성이가 돼서 한의원에 오신 선옥님을 뵐 때마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셨을지 궁금해진다. "오늘 일할 땐 많이 더우셨어요? 점심은 뭘 드셨어요? 새참도 나왔나요?" 선옥님의 신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더 정성껏 침을 놓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