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 집에 대하여
태어나서 지금까지 몇 번의 이사를 했다. 그중 내 기억 속에서 '우리 집이다'라고 생각이 드는 곳은 딱 한 집 밖에 없었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그 집. 내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 집은, 가족들과의 많은 추억이 담겨 있다. 그 집을 떠난 지 꽤 오래되었지만 다시 그 동네를 가게 되면 참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련하면서도 뭉클한, 그 무엇인가가 피어오른다. 그런 감정이 문득 외할머니 집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우리 외할머니는 몇 년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쭉 추억이 깃든 그 집에서 정든 동네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을 팔아 최신식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이 나온 적이 있다. 사실 지금 외할머니 집은 엄마가 태어나기 전부터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이었기 때문에 화장실을 가려면 마당으로 나가서 일을 봐야 한다. 점점 쇠퇴해지는 외할머니를 위해 나온 말이었지만, 이내 그 말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오랫동안 지냈던 집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는 것이 더 힘들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나 역시 그 의견에 찬성했다. 일단 무엇보다 외할머니 집이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반대 했다. 어렸을 때 뛰어놀던 내 나름의 추억들이 새겨져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슬펐다. 사실 고백하자면, 외할머니와 그렇게 많은 교류가 있거나 친근하진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엄마에게서 들었던 엄마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항상 그 집이 모델이 되었다. 사진으로나마 흐릿하게 남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엄마의 과거 얘기를 통해 나름 머리로 영상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외할머니 집에 자주는 못 가더라도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놀러가게 되면 그때만큼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분명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과 같을 텐데도 이상하게 외할머니 집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그래서 순간순간이 사진처럼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실의 큰 문을 양쪽으로 열고 마당을 보고 있노라면 햇살이 마당에 그대로 떨어져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모습을 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다.
그렇게 정든 외할머니 집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 그대로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한없이 서글퍼진다. 그 자리 그대로 있으면 참 좋으련만 그러기엔 시간은 참 냉정한 면이 있다. 갑자기 재계발을 한다고 할 수도 있고, 그래서 누군가가 웃돈을 줄테니 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면.. 그렇게 돼버린다면. 외할머니의 손 때가 묻은 집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가까이 사는 외삼촌이 그 집에 들어와 살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집을 그대로 둔 채 누군가에게 새를 내줄 수도 있고. 만약 그것도 아니면 아마 내가 걱정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아마도 필름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외할머니 집으로 갈 것 같다. 집의 외관부터 시작해서 장독대가 올려져 있는 이층도 찍고, 그 이층에서 집 전체를 내려다보면서 한 컷을 찍고. 하나하나 눈에 담듯 카메라에 그 따뜻하고 울타리 갔던 집의 모습을 담아낼 것이다.
해 질 녘, 여자는 할머니 집에 도착한다. 미리 건네받은 열쇠를 들고 대문 앞에 선다. 열쇠를 꺼내 문을 열기 전, 여자는 가방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내 뒤로 몇 발자국 간 뒤 대문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다. 그리곤 카메라 줄을 목에다 걸고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연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의 모습은 여자가 어렸을 때 뛰어놀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단지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할머니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먼지들이 쌓여있다는 것.
여자는 마당에 서서 눈으로 집의 풍경을 담는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며 집 이곳저곳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물놀이를 했던 마당, 유난히 가파랗던 장독대가 있는 이층의 계단. 그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만 볼 수 있었던 동네의 풍경, 그리고 할머니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잠을 청했던 벽지가 노랗게 바랬지만 먼지 하나 없었던 방들의 모습까지, 찰칵- 소리를 내며 여자는 사진을 찍는다.
한참 사진 찍던 여자는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거실의 양쪽문을 다 열고 거실 끝에 걸터앉는다.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여자는 어두워진 집 안 풍경을 또다시 눈에 담기 시작한다. 그때, 삐걱 소리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린다. 삼촌이다. 여자는 삼촌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삼촌은 그냥 앉아있으라는 듯 손짓을 하며 여자에게 다가간다. 여자는 삼촌의 손짓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여자에게 다가간 삼촌은 여자 옆에 앉는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삼촌이었다.
"우리가 원망스럽지?"
하늘을 보던 여자는 고개를 돌려 삼촌을 쳐다본다.
"이 집을 팔지 않았으면 좋겠지?"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빈 마당을 쳐다보는 삼촌. 여자는 여전히 삼촌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사실 나도 이 집을 팔고 싶지 않아. 팔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 당연히 팔지 않았을 거야."
삼촌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말이야. 그럴 수가 없었어. 다들 사정이 있었어. 추억을 지키기엔 너무 힘든 사정들이 있었어."
여자는 잠자코 삼촌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인다.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 딸을 위해, 늦게라도 찾은 꿈을 지켜주고 싶은 엄마는 딸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몇 달있으면 결혼을 하는 아들을 위해, 비록 사는 게 힘들겠지만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은 아들을 위해 아빠는 집을 지킬 수 없었어. 그리고 언제 깨어날지 모를,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어. 비록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어쩌면 평생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곁에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남편은 그럴 수밖에 없었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어."
말을 끝낸 삼촌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킨다. 여자는 짧은 한숨을 내뱉곤 하늘을 쳐다보며 말한다.
"저도 들었어요, 삼촌. 엄마한테. 원망 같은 거 안 해요. 감히 제가 누굴 원망해요. 그리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집을 팔자고 어렵게 말을 꺼낸 사람 잘못도 아니고, 정든 집을 절대 팔 수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도 잘못한 건 없어요.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죠.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 여자를 말없이 바라보는 삼촌. 잠시 후, 여자가 말을 잇는다.
"근데요. 그래도 슬픈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저 사실 많이 슬퍼요. 여기서 참 많이 놀았는데. 좋아했는데.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건 있거든요. 사촌 언니, 오빠랑 물놀이하고 놀았던 거, 숨바꼭질 할 때 안방이랑 연결돼있던 창고에 몰래 숨었던 거. 작은 방에서 게임하며 놀았던 거. 사실 진짜 기억력 안 좋은데 그건 또 기억하고 있어요. 신기하게. 그래서 너무 아쉬워서 사진 찍었어요, 잔뜩."
여자는 옆에 내려놓았던 카메라를 들어 삼촌에서 보여준다. 삼촌은 살며시 웃으며 카메라를 받는다.
"아직도 필름 카메라 쓰는 사람도 있네. 신기하다. 나도 사진 찍는 거 좋아했었는데."
삼촌은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는 시늉을 한다. 여자는 삼촌의 모습에 살짝 웃음 짓는다.
"사실 생각해보면 저보다 엄마나 이모, 삼촌이 여기서 지낸 시간이 더 길잖아요. 그러니까 저보다 더 마음이 이상하시겠죠."
여자는 입을 삐죽 내밀며 삼촌을 바라본다. 삼촌은 그런 여자를 보며 왠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 천천히 어두워진 집 안 구석구석을 눈에 담는 삼촌.
"처음엔 모든 게 다 사라지는 것 같아서 이상했어. 네가 말한 것처럼, 나도 아직 기억에서 생생한데. 그런데 말이야. 그냥 그런 것 같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같아. 원래 이렇게 지나가는 거겠지, 생각하면서.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거야. 그냥 흐르는 대로,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는 거구나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면, 그러면. 적어도 마음은 편하니까. 그리고 너 말처럼 그래도 우리한텐 남아 있잖아, 그 시간이. 그렇지?"
삼촌은 여자를 보며 방긋 웃는다. 그런 삼촌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웃는다.
"사진 인화하면 나도 좀 챙겨줘. 사진 앨범 하나 사서 고이 모셔놔야지. 나중에 손자 생기면 보여줘야하니까. 할아버지가 옛날에 살았던 집은 이렇단다 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는 삼촌, 괜스레 기지개를 활짝 켠다. 여자는 기지대를 활짝 켜고 있는 삼촌을 올려다본다.
"그럴게요. 찍은 사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내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나는 이제 가볼 테니까,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집으로 가. 엄마가 기다리신다."
"네, 그럴게요. 삼촌."
터벅터벅 걸어 대문 앞으로 가는 삼촌. 대문을 열고 다시 한번 여자와 눈을 마주친다. 손을 흔드는 삼촌. 여자는 삼촌과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손을 흔든다. 곧, 삼촌은 사라지고 텅 빈 집에 혼자 남은 여자. 다시 앉아 괜스레 손으로 거실 방바닥을 어루만진다.
그냥 그렇다. 어딘가가 사라지면, 어딘가에선 다시 새로운 게 생겨나듯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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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