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게으름에 대하여
나는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렸을 때는 글을 쓸 때마다 들리는 연필의 서걱거리는 소리를 좋아했고, 요즘엔 검정 펜으로 수정 없이 써 내려가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조금은 느리고 시대에 뒤쳐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빠르게 전해지는 톡보다 손으로 쓰고 전달될 때까지 꽤나 시간이 걸리는 편지를 좋아하는 편이다. 아마 편지를 쓰는 동안엔 오롯이 한 대상만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기에 더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꾹꾹 마음을 눌러 담아 보낸 편지에 답장까지 받게 된다면, 그 기쁨은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이렇게 느림에 적응되어 있는 나는, 이렇게 남들보다 한 템포씩 느린 나는 앞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사람들의 템포를 따라가는 것이 가끔은 벅차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 나에게 있었던 일,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기억, 미래에 대한 약속 등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혹은 경험했던 여러 감정들을 공유하는 것이지 않을까. ‘오늘 이런 일이 있었는데 너무 좋더라’, ‘오늘 여기서 누굴 만났는지 알아’ 와 같은, 오늘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이지 않을까. 특별할 것은 없지만 궁금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으로. 나는 언제부터 이러한 마음이 희석되기 시작한 걸까. 언제부터 누군가에게 나의 일상을 말하지 않게 된 것일까. 그리고 왜 그러한 사소한 연락만으로도 피로감을 느끼게 된 것일까.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당신과 같아 공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힘들었던 감정을 토닥여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내 미움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그러한 위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 일이니까. 그래서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었다. 소소하고 사소한, 그 감정을 나열할 수 있는 연락이 싫지 않았었다.
싫어하지 않으면서 왜 바뀌었을까,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그러한 질문이 만들어낸 약간은 삐딱한 생각 하나. 재미가 없어서, 이지 않을까. 내 일상이 재미가 없기 때문에. 그저 밋밋하고,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맹맹해서. 그렇기에 나의 일상을 전하는 것에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라는 조금은 우울한 생각을 해본다. 과거의 나,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내가 큰 변화 없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서 이 고요하다 못해 무료한 일상을 더 이상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삐딱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들면서, 그렇게 누군가와의 소통 역시 내려놓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반대의 생각 하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저 오롯이 듣는 것이 이제 버겁다는 것. 이야기 자체를 듣는 것보다 그 속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더 버겁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저 문장 그대로,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말과는 전혀 다른 감정과 행동을 마주 할 때가 있다. 대화 중에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혼자 속이 울렁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사람들의 또 다른 언어를 보고 난 뒤, 혼자 남겨지는 날이면 허무한 감정이 들곤 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곱씹게 된다. 지금까지 진심으로 여겼던 그 말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어떤 의도였을까. 그렇게 혼자서 그 의미들을 곱씹어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마음이 복잡해지곤 한다. 그리고 순간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그동안 함께 나누었던, 나누었다고 생각했던 그 대화들은 당신에겐 어떤 것이었나요.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요, 묻고 싶어 진다.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이 된 것 같아서.
그러한 너의 감정, 나의 감정으로 인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마음을 나누는 것이, 생각을 나눈 것이 조금씩 벅차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쓰면서 문득 든 나에 대한 생각 하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점점 멀어지게 한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나의 게으름. 내가 가지고 있는 관계의 게으름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나에게 던지는 화살. 다음에,라는 단어로 회피했던 사람들과의 수많은 약속과 대화들이 떠오른다. 지금 당장은 부담스럽지만 언젠가 너와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면 만나겠다는 회피성 단어, 다음에. 그 회피성 단어를 수도 없이 써왔던 과거의 내 모습들을 떠올리며 반성과 자책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 기회로 생각하지 못했던 그 사람과의 만남, 너와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었던 그때 그 약속, 같이 가자고 했던 그 장소의 기약 없는 기다림까지. 떠오르는 기억을 하나 둘 회상하고 있노라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치고 있던 건 바로, 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떠나 보낸 인연, 나를 떠난 인연을 하나 둘 머릿속에 놓아 두니 괜스레 마음이 심란해진다. 그때의 넌 나에게 진실했을지, 괜스레 궁금해지는 오늘. 그와 반대로 그때의 나는 너에게 진실한 마음이었을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잃어버린 나의 인연이, 놓쳐버린 나의 인연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혹은 새로운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설렘을 여전히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지금의 나. 그 기대감과 함께, 그 설렘과 함께 다짐해본다. 과거처럼 게으름때문에 소중한 인연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새롭게 찾아 올 인연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매주 화요일, 책에 담겨 있는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제 1화 <관계를 망치고 있던 건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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