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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y 04. 2020

네가 되어야 할 건 너 자신이야

<청춘 스케치>_리셋되는 삶은 없다. 다음 시작이 시작될 뿐.

청춘 스케치

시작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가슴 터질듯한 설렘을 안겨준다. 그 앞에 새로운 이라는 단어가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조금 구질구질하다 느꼈던 삶을 리셋 버튼 한방으로 전혀 다른 삶으로 변화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십 대 때 이십 대가 되면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지난날의 내 모습처럼.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꿈꿔왔던 모습대로 이루어질 거라 믿었던 철 모르던 어린 내 모습처럼.


 레이나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 청운의 꿈을 안고 텍사스 TV 방송국에 입사하지만 고지식한 프로그램 진행자와의 갈등 끝에 직장을 잃고 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의 친구이자 가수 지망생인 트로이 역시 실직상태로 그녀의 아파트에 얹혀사는 신세. 그런 그들 사이에 전형적인 여피족인 방송국 부사장 마이클이 끼어들고, 레이나는 그의 끈질긴 구애로 인해 방황하게 된다. 그 후 레이나는 마이클의 도움으로 자신이 만든 영화를 비디오로 출시하게 된다. 젊은 세대의 사고를 대변해 보겠다는 의도로 틈틈이 자신과 친구들의 일상생활을 카메라에 담아낸 기록영화였다. 그러나 상품으로 완성된 영화는 당초 의도와는 달리 지나치게 상업적인 요소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영화는 대학 졸업식 연설을 하고 있는 레이나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어른들은 우리 이십 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뭇 진지한 주제를 시작으로 연설을 이어나가지만 정작 연설문의 가장 마지막 장을 찾지 못해 주제의 해답은 잘 모르겠다는 결론으로 내놓고 만다. 막 졸업식을 끝낸 레이나, 트로이, 빅키, 새미는 술과 피자를 나눠 먹으며 각자의 미래를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취직이나 하겠다는 새미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이미 대학의 단맛 쓴맛을 다 봤다고 말하는 트로이, 학자금 융자 담당 직원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빅키와 다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 말하는 레이나까지 얼큰하게 취한 그들은 술기운에 취해,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취해 햇병아리 취급받는 학생에서 벗어나 어엿한 성인이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삶은 그들이 꿈꿔왔던 것만큼 그리 녹록지 않다. 부푼 꿈을 안고 방송사에 입사한 레이나는 자신의 의견을 번번이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집세 낼 돈이 없는 트로이와 새미는 레이나와 빅키가 살고 있는 집에 무작정 쳐들어가 얹혀살기로 한다. 빅키는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번듯한 직장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격지심을 갖게 된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이 꿈꿔왔던 미래의 모습과 다른 균열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영화 안에서 가장 마음이 갔던 인물은 레이나와 트로이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듯 닮아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영화를 보며 어느 때는 트로이가 되었다가 어느 장면에선 레이나가 되었다. 두 인물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비교적 명확하게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레이나는 졸업식에서 연설문을 읽을 정도로 꽤나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사에 취직하였고 친구들의 삶을 찍으며 '각자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 트로이는 일찌감치 대학 졸업하기를 포기하고 밴드를 하기로 한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푼돈을 벌고 있지만 삶에서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담배 한 모금, 커피 한 잔, 약간의 대화, 너와 나, 그리고 5달러'라는 낭만적인 대사를 읊을 정도로 트로이와 레이나는 자신이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마치 앞으로의 삶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지만 그들 역시 아직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풋내기 청춘일 뿐이다.



레이나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사에게 보복 아닌 보복을 하며 직장을 잃게 된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지만 빅키가 일하는 옷 매장 따위에선 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빅키의 일을 존중하지만 그와 자신의 인생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빅키처럼 단순히 돈을 위해 돈을 버는 것보다 꿈에 발돋움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돈 벌기를 원하지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들으며 연신 거절을 당한다. 끝내 돌고 돌아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자신이 무시했던 그 일마저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 레이나는 짙은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그 누구보다 똑똑하다 자부하며 친구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레이나는 초라한 모습으로 소파에 누워 상담원과 통화를 하며 공허한 마음을 달랠 뿐이다. 자신의 시간만 멈춘 듯 살던 레이나는 마이클의 도움으로 자신이 그토록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던 다큐멘터리를 발표하게 되지만 자신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중2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춘으로 묘사되며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된다.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을수록 더 깊고 진한 좌절을 맛보게 된다. 꿈의 낙차가 클수록 지독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계속해서 실망하는 일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무엇보다 진지하게 대했던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이 난도질 당해 사람들에게 비웃음 당하는 것을 감내하는 것. 나의 진지한 태도를 모두가 알아줄 거라는 기대감을 조금 내려놓는 일. 청춘의 고뇌와 번뇌보다는 밝게 빛나는 청춘의 모습만을 원하는 혹은 그 따위는 고뇌와 번뇌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무시를 감당해내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나가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걸 수도 있겠다.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끊임없이 내가 저지른 일을 책임지고 수습하고 책임지고 수습하는 일의 연속. 그래서 나는 영화의 마지막 결말이 좋았다. 레이나와 트로이가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끝나는 사랑의 엔딩도 아니고, 무시당했던 다큐멘터리를 대중들에게 다시 소개하면서 원하던 호응을 얻게 되는 성공의 결말도 아닌, 부모님이 주신 주유카드로 간신히 수습해놓은 전화비를 다시 수습해야 하는 결말이어서 좋았다. 원하던 사람과 사랑이 이루어져도, 다큐멘터리로 원하던 반응을 얻지 못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나는 다시 일어나 과거를 수습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게 될 거라는 걸 말해주어서 좋았다. 사실 새로 시작될 수 있는 삶이란 없다. 오늘은 잊고 어제를 벗 삼아 다시 내일을 살아내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부족했던 오늘을 잊고 부단히 견뎌냈던 어제를 벗 삼아 다시 시작될 내일을 위해 우리는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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