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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Jun 20. 2020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주인의 얼굴을 핥아준다

<환상의 마로나>_행복은 작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환상의 마로나

흰털에 군데군데 노란 점박이 무늬를 가지고 있는 반려견 감자와 구 년째 함께 살고 있다. 감자와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늘어난다. 감자가 품고 있는 생각과 마음을 모조리 알고 싶다는 욕심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양팔을 만세한 채로 누워있는 감자의 얼굴을 시간 들여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이 오는지 눈을 끔벅이던 감자는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계속해서 덮쳐오는 잠을 떨쳐내려 애쓴다. 어떻게든 나와 마주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어 보지만 한없이 두터워진 눈꺼풀을 이겨내기에는 이미 너무 나른해진 듯하다. 감자는 눈을 마주하는 대신 연신 내 얼굴을 핥으며 양해를 구한다. 미안하지만 조금 잠을 자야 할 것 같아. 괜찮다면 내가 한숨 자고 난 뒤에 서로 바라보는 것이 어때? 따뜻하고 다정하게 양해를 구한 감자는 이제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깊은 단잠에 빠지기 시작한다. 단잠에 빠진 감자의 얼굴 가까이에 내 얼굴을 가져간다. 규칙적으로 숨을 내뱉은 감자의 숨소리가 조용히 들린다. 균일하게 커졌다 작아지는 감자의 몸을 가만히 바라본다. 힘을 주어 눈을 꾹 감고 있는 감자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이 자그마한 아이는 도대체 어떤 특명을 받고 이 세상에 내려왔길래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일까. 어떻게 이리도 대책 없이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안녕, 내 이름은 마로나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마로나. 
형제들을 떠나 인간 주인을 만나면서 견생의 제2막이 오른다. 
  
곡예사 마놀부터 건설업자 이스트반, 귀여운 소녀 솔랑주까지. 
새로운 주인을 만날 때마다 마로나 역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데… 
  
함께할 수 있는 인간이 있어 행복한 강아지 마로나 
꿈보다 몽환적이고 동화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마로나의 죽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는 솔랑주에게 괜찮다며 연신 안심시키면서 마로나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펼쳐나간다.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아이는 아홉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처음 불려진다. 사실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편의적으로 얻게 된 것이었지만 아홉에게는 형제들과 함께 부여된 숫자이기에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9남매에게 엄마는 자뭇 진지한 태도로 말한다. "인간은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인간의 말을 이해해야 해. 자신을 지키려면 인간의 말을 배워야 한단다." 인간의 말을 배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왜 배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아홉은 엄마와 형제들과 떨어져 홀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엄마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마로나의 시점으로 마로나가 바라본 세상을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몽환적인 그림체와 수려한 색채로 마로나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우리가 흔히 봐왔던 애니메이션과는 조금 다른 독특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이 영화는 정말 개가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렇게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만큼 독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묘사한다. 마로나가 바라본 인간과 세상은 괴상하고 어지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랑과 행복을 찾아낸다. 자신에게 처음 이름다운 이름을 지어준 마놀에게 마로나가 바라는 것은 너무도 소박하다. 지금처럼 자신이 잠을 잘 수 있는 곳과 뼈다귀를 숨길 수 있는 아주 약간의 공간 그리고 언제나 마놀과 함께 하는 것. 마로나의 바람처럼 마놀은 어디를 가든 마로나와 함께한다. 곡예를 하며 돈을 벌 때도,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먹을 때도, 집으로 돌아와 잠들 때도 마놀은 언제나 마로나와 함께다. 마로나는 마놀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행복해하면서도 동시에 이 행복이 깨질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마로나는 아직 찾아오지 않는 미래보다 마놀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에 더 집중한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주인의 얼굴을 핥아준다는 말처럼 마로나는 마놀과의 매일매일을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 담는다. 


언제부턴가 감자가 자기 전에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 하나 생겼다. 누워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내 얼굴을 핥아주는 일이다. 감자는 보통 내 발 밑에서 선 잠을 자다가 내가 잘 준비를 끝내고 누우면 베개로 와서 등을 보인 채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 나는 감자 등에 얼굴을 묻고 함께 잠들곤 했는데 어느 날 평소처럼 잘 준비를 끝내고 감자를 부르는데 가까이 오다 말고 자리에 앉아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누워있는 내 얼굴을 한참을 내려보던 감자는 항상 눕던 등이 보이는 방향이 아닌 마주 보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누워서도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자신의 성에 찰 때까지 얼굴을 핥아주다가 잠들었다. 처음에는 혹시 어디가 불편한 것일까 걱정하는 마음이 컸는데 그 날을 시작으로 매일 밤 얼굴을 한껏 핥아주고 자는 감자를 보며 어디 아픈 것은 아니구나 안심하며 잠에 들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며 감자도 어느 순간 문득 마로나와 같은 생각이 든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항상 최선을 다해 사랑을 전해주고 있으면서도 혹여나 부족할까 싶은 마음에, 이 행복이 떠나갈까 두려운 마음에, 앞으로도 함께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 곤히 잠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감자의 넓고 깊은 사랑을 이해하기에는 나는 한없이 부족한 존재였다.



인간은 반려견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 알아서 대소변을 가려주길 바라고, 시끄럽게 짖지 않길 바라고, 집에 있는 물건을 함부로 어지럽히지 않길 바라고, 내가 하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차려주길 바란다. 이뿐인가. 되도록이면 좋은 품종이길 바라고, 귀엽게 생긴 얼굴이길 바라고, 재주를 부리며 애교 떨어주기를 바라고, 다 자라나도 데리고 다니기 부담스럽지 않을 크기가 되길 바란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전시하기 위해 이용하기도 하고, 순간의 흥미를 채우기 위해 선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온갖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털이 많이 날린다고, 집에 개 냄새가 진동한다고, 이제 커져서 별로 귀엽지 않다고, 부담스럽다고,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밀어내고 버릴 수 있는 갖가지 이유들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한없이 모자라고 이기적인 인간은 모든 것을 반려견의 탓으로 돌리지만 반려견은 결코 인간을 탓하지 않는다. 그저 염려하기 바쁘다. 혹시 나 때문에 불편해지는 건 아닌지, 혹시 내가 실수를 해서 상처를 준 건 아닌지, 내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건 아닌지 염려하고 또 염려한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밖에 없어서 애달파한다.


나조차 나를 의심하고 있는 순간에도 감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루하루 수많은 질문들이 쌓여가는 나와는 달리 감자는 빽빽이 놀이 하나에도 입이 찢어질 정도의 행복감을 느낀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고 행복을 느끼는 데에 여러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마음의 크기가 다르다고 원망하지도, 더 많이 사랑해달라고 갈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랑할 수 있는 기회만을 바란다. 원 없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 오늘도 염치없이 누군가에게 베풀어본 적 없는 사랑을 감자에게 받았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행복은 작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우유 한 접시. 실컷 축인 혀. 낮잠. 뼈다귀 묻을 곳. 행복은 작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손. 미소. 목소리. 마음. 마로나가, 감자가 느꼈을 행복의 크기이자 사랑의 크기. 가능하다면 꼭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길 바란다. 모든 영화가 그렇겠지만 이 영화의 완성은 엔딩 크레딧이 끝나는 순간까지다. 물론,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당해내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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