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보이>_이름을 찾는 시간.
올해 초 작업하던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 공고를 낸 적이 있었다. 공고를 내고 얼마 되지 않아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이메일로 연락을 주었고 이름과 포트폴리오를 확인하며 누구에게 의뢰를 하는 게 좋을까 고민에 빠져있었다. 최종 후보 두 명을 놓고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한 사람에게 연락을 보냈는데 그 사람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이름을 보고 여성일 것 같다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여성과 일하는 것이 덜 부담스러울 것 같다는 이유로 연락을 보냈던 그 사람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남성이었다. 평소에 여성의 일, 남성의 일을 규정짓기 싫어하는 나조차도 오랫동안 배워온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을 <톰보이>를 보며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영화 <톰보이>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성스러운 것은 무엇이며, 또 남성스러운 것은 무엇이냐고.
새로 이사 온 아이, ‘미카엘’.
파란색을 좋아하고, 끝내주는 축구 실력과 유난히 잘 어울리는 짧은 머리로
친구들을 사로잡는 그의 진짜 이름은 ‘로레’!
눈물겹게 아름답고, 눈부시게 다정했던
10살 여름의 비밀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셀린 시아마 감독 때문이었다. 그의 가장 최근작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워낙 감명 깊게 봤던 터라 한참 영화에 빠져 출연한 배우와 감독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곤 했는데 그때 처음 <톰보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톰보이>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간 영화라고 해서 이 영화도 퀴어 영화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나의 납작한 예상과는 다르게 영화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영화는 달리는 차 안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한 아이의 뒷모습에서 시작된다. 머리카락이 짧고 펑퍼짐한 반팔티를 입고 아이는 아빠에게 운전을 배운다. 운전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가족들과 단란하게 둘러앉아 동생과 장난을 치며 밥을 먹는다. 베란다에 기대 무료한 표정으로 동네를 구경하던 아이는 남자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같이 놀고 싶은 마음에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리사를 만난다. 리사는 아이에게 묻는다. "너 이름이 뭐야?" 아이는 망설임 없이 말한다. "미카엘".
82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번이나 혼란에 빠졌었다. 아이가 하는 행동이 정확히 무엇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인지 명확하게 손안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는 원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를 봐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처음 미카엘의 행동을 보고 단순히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인가 싶었다. 남자아이들이 하는 축구에 끼고 싶어 하고 윗옷을 벗고 땅바닥에 침을 뱉는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그들과 같은 남성성을 갖고 싶어서 하는 걸까 했다. 알고 보니 그 반대였다. 미카엘은 남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남자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여자인 자신도 똑같이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마 1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배워왔을 것이다. 남자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기 위해선, 소위 남자들만 할 수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선 그들과 비슷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여자다움은 무엇이고, 남자다움은 또 무엇인지.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자연스럽게 학습하게 된다. 집에서 밥을 하는 엄마와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아빠. 화장을 하는 엄마와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아빠. 치마를 입는 여자와 바지를 입는 남자. 여자 아이에게는 당연하게 핑크색을 남자아이에게는 당연히 파란색을.
나 역시도 어렸을 때 치마를 즐겨 입었다. 옷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치마를 입어왔다. 처음엔 엄마가 입혀줬기 때문이었지만 나중에는 내 또래 여자 아이들과 같아지기 위해 내가 선택해서 치마를 입었다. 엄마의 화장품으로 놀이를 즐겨하기도 했다. 엄마의 립스틱을 몰래 입술에 발라보기도 하고 엄마의 모습을 따라 하며 화장품으로 양볼을 빨갛게 물들이기도 했다. 그 당시 내가 배운 여성의 이미지는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건 미카엘과 비슷한 나이인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였다. 나 역시도 미카엘처럼 몸을 쓰며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활동적인 운동을 하기에 치마는 거추장스러운 옷이었고 엄마에게 부탁해 활동하기 편한 옷을 사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펑퍼짐한 티와 바지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녔는데 그때 처음 여자 같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자다워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숏컷으로 머리를 잘랐는데 왜 잘랐냐는 이야기부터 뒤에서 보면 남자 같다, 머리를 길으면 그나마 봐줄 만할 것 같다, 너는 여자 같지 않다는 말까지 짧은 머리 하나로 무수한 말들을 들었다. 화장을 좋아하지 않아 화장을 하지 않고 다니면 매너가 없다, 화장은 사회생활의 일종이다, 여자답게 꾸며야 한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이미 여자인 내가 더 여자답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초경을 했을 때 '드디어 여자가 되었다'는 말만큼이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로레는 그저 미카엘이라는 이름이 자신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름을 묻는 리사에서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처럼 주저함 없이 자신의 이름은 미카엘이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미카엘은 긴 머리보다 짧은 머리가 편했을 뿐이고 핑크색보다 파란색을 더 좋아할 뿐이고 축구를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뛰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런 로레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생인 잔과 리사뿐이었다. 로레가 남자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잔은 왜라는 물음보다 오빠라는 말로 로레를 감싸주었고 가족들의 질문에도 미카엘이라는 가상인물을 만들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로레가 남자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들켰을 때 울고 있는 로레를 제일 먼저 위로해준 것 역시 잔 뿐이었다. 아직 사회적인 관념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잔만이 로레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존중해줄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론 서글프고 씁쓸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개학을 코 앞에 둔 로레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함께 놀았던 친구들을 잃고 또다시 혼자가 된다. 영화의 처음처럼 베란다 앞으로 가 친구들을 찾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허망한 마음으로 밖을 바라보던 로레는 곧 로레를 바라보고 있는 리사를 발견하게 된다. 로레는 리사에게 가는 내내 기쁜 마음과 함께 혹시나 하는 두려운 마음 또한 공존하게 된다. 나무에 기대에 쭈뼛거리던 리사와 로레는 리사의 물음으로 어색했던 침묵이 깨진다. "너 이름이 뭐야?" 로레는 말한다. "로레". 곧 로레는 리사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앞으로 자신에게 이보다 더 큰 시련이 다가와도 자신과 함께 있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기꺼이 그 아픔을 감당해낼 수 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