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_ 시간은 언제나 무심히 흐른다.
염치없게도 여전히 부모의 보호를 받는 것이 익숙하다. 어른을 찾는 전화에 당연하다는 듯 엄마를 바꿔주거나 보험비 하나 내는 것에도 금세 어리둥절해져 종이를 펄럭이며 부모를 찾아가기 일쑤다. 꼬박꼬박 나이를 먹긴 했지만 여전히 무섭고 어려워 보이는 것 앞에서는 열 살 먹은 어린아이 마냥 부모의 뒤꽁무니에 숨는 것이 편하고 익숙하다. 그렇게 마냥 어린아이처럼 굴다가도 덜컥 부모의 보호자 역할을 도맡아야 할 때가 생기곤 한다. 사람이 북적이는 대학 병원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예약한 과를 찾아다녀야 할 때. 접수처에서 부모의 이름을 적고 안내사항을 빠짐없이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때. 부모가 진찰을 받고 나올 때까지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려야 할 때. 처방받은 약을 꼼꼼히 살피고 챙겨야 할 때. 언제나 나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던 부모의 몸과 마음이 점차 늦어지고 더뎌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의 어설픈 부모가 되고 그들은 나의 늙은 아이가 되고 만다.
나는 런던에서 평화롭게 삶을 보내고 있었다.
무료한 일상 속 나를 찾아오는 건 딸 ‘앤’ 뿐이다.
그런데 앤이 갑작스럽게 런던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 순간부터 앤이 내 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 앤이 내 딸이 맞기는 한 걸까?
기억이 뒤섞여 갈수록 지금 이 현실과 사랑하는 딸,
그리고 나 자신까지 모든 것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진다.
영화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바삐 걸음을 옮겨 집에 도착한 앤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안소니를 발견한다. 노년의 평화로운 일상을 지내고 있는 듯 보이는 안소니에게 앤은 상의 없이 도우미를 내쫓았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호소한다.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비롯해 자꾸 자신의 물건을 탐했다는 이유로 도우미를 내쫓은 안소니는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며 앤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안소니의 말을 듣던 앤은 굳게 다짐한 듯 언제까지고 안소니의 옆에 있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파리로 떠날 계획을 하고 있다는 말을 전한다. 자신의 곁을 영영 떠날 것처럼 말하는 앤에게 안소니는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만 언제까지고 자신의 곁에 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슬픔을 애써 억누르려 한다. 다음 날, 잠에서 깬 안소니는 거실에서 여유롭게 신문을 읽고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어제 앤이 말한 파리에서 새로운 삶을 함께 꾸려나갈 남자일 거라 생각한 안소니는 남자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남자는 오랫동안 앤과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며 안소니의 말을 의아해한다. 설상가상으로 앤이라며 안소니 앞에 나타난 여자는 어제 살갑게 대화를 나눴던 앤의 모습이 아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자신이 앤이라고 말하는 여자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지며 평온하게 흘러가던 안소니의 삶은 혼란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저 나이 든 부모를 걱정하는 자식과 그런 자식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하는 부모의 평범한 대화처럼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리 특별하지 않게 잔잔한 일상을 전하듯 진행되던 이야기는 갑자기 등장하는 낯선 인물과 앞 뒤가 맞지 않는 대화의 정보로 인해 조금씩 상황이 뒤엉키고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분명 극 초반에 이미 전달된 정보를 영화는 여러 인물과 상황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한다. 똑같은 질문이 거듭될수록 이야기는 미묘하게 어긋나고 급기야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의심하며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데 그 지점에서 영화는 뜻밖에 스릴러적인 흥미를 증폭시키며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는 파편화된 듯 수없이 재편집과 수정이 이루어지며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그러한 방식에 의문을 갖게 될 때쯤 파편화된 모든 장면들은 사실 치매를 앓고 있는 안소니의 감정과 상황을 오롯이 담아낸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만든다. 안소니는 끊임없이 손목에 있어야 할 시계를 찾고 시계를 찬 누군가의 손목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시계를 차고 있어야지만 자신의 시간이 올바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듯 안소니는 시계에 집착하는데 온통 뒤죽박죽 파편화된 기억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보겠다는 안소니의 구슬픈 몸부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변화하는 자신의 몸에 적응하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안소니의 고통만큼이나 그를 돌봐야 하는 앤의 고통 역시 영화는 담담하지만 세심하게 담아낸다.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리라 믿었던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 조자 까맣게 잊어버리는 노인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앤은 그저 아버지를 묵묵히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그가 느끼는 고통과 슬픈 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앤은 자신 앞에 놓은 두 가지의 선택지 앞에 갈등한다. 어린 자신을 돌봐줬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끝까지 아버지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와 동시에 평생 아버지 옆에만 있을 수 없다는, 자신의 인생도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함. 어떠한 선택도 쉬이 내일 수 없는 선택지 앞에 앤은 고뇌에 빠지며 힘겨운 선택을 내리게 된다.
안소니는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햇살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젖혀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평화로운 일상을 지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도 하고 비닐봉지 하나에도 신이 난 듯 놀이를 하는 아이의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기도 하고 바람에 덧없이 흩날리는 잎사귀를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기도 한다. 이미 수없이 바라봤을 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소니는 언제까지고 이 평화로움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바람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덧없이 흩날아가 버리고 그는 그 무심함에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눈물을 흘리고 만다.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언제 피고 졌는지도 모를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영화는 찬란하게 빛을 내는 하늘의 풍경과 함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는 울창한 나무의 모습을 응시한다. 매서웠던 바람은 어느새 상쾌한 바람으로 바뀌고 그렇게 우리의 계절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본 포스팅은 영화사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하였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